Post Reformation/Puritan Theology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간절목회 - 존 에인절 제임스(John Angell James)

Bavinck Byeon 2016. 4. 2. 01:18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간절목회


존 에인절 제임스(John Angell James, 1785-1859)



- ‘목회학3대 고전(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찰스 브릿지스의 참된 목회)으로

목회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 6개월만에 3, 12개월 만에 4

- 고후11:2의 말씀을 기초 본문으로 목회 사역의 본질을 설파하는 불같은 뜨거운 책

- 목회 사역의 본질과 실천을 간절한 열심이라는 개념 속에 응집시키고 있음

- 목회 직무의 중심인 참된 설교와 목양의 진수, 그리고 사역자 개인의 경건의 본연을 설파



지은이의 머리말


저자는 현대의 복음적인 강단이 가졌던 권능의 일부를 이미 상실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시대로 되돌아가 현재 강단들의 실상을 비추어보면, 현 시대의 강단이 그런 시대와 동일한 결과를 맺고 있다고 말할 이유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복음 전파의 큰 목적은 죄인들로 회심케 하고, 이미 믿는 자들로 영적 진보를 하게 하는데 있는데, 현재 복음적인 강단은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단의 권세가 약화된 것, 강단의 감화력이 하락된 것이 그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간절한 열심 목회만이 강단의 권세를 회복할 수 있음을 설파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Chapter 1, 사도의 목회 사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


참으로 놀라운 이 본문을 문맥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본문은 매우 아름다운 단순성을 드러내면서도, 기독교 목회 사역의 빼어난 장엄성과 주제와 계획과 방식을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세상을 당신과 화해(和解)케 하시는 하나님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목회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과 실제적인 화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달(暢達)하시고 선포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중보의 체계를 의존하여 그 진리로 인간의 패역한 마음을 설득하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그 목회 사역이 진행됩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모든 절대적인 행실을 중지하라 호소하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은혜로운 사면(赦免)의 제안을 받으라 권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목회 사역의 방식인 것이다.


목회 사역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설교자의 설득과 호소의 방식이 조화를 이루면, 목회 사역은 매우 독특한 감동을 일으킵니다. 어떤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직을 수행하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편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합시다. 그러한 목회자는 죄인들을 설득하고 인도하여 하나님과의 실질적 우정(友情)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의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지 않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거룩한 성직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득과 호소는 목회직의 의무를 효과적으로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 방식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주신 설득과 호소의 기술과 방편을 소홀히 하면, 그는 하나님의 제정하신 방식을 스스로 평가 절하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종용하였습니다. 사도가 그러한 권면이 담긴 편지를 쓴 일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들은 신앙고백을 통해 이미 하나님과 화해한 상태에 있던 자들임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2인칭 대명사는 헬라 원문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하기 위해 영역자들이 첨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 사람들(people)’이라는 단어로 대체한다면, 사도가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에 들어가라고 촉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기록한 본문의 대상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사람들이여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는 사도가 사역의 직무에 속한 여러 역할들을 감당할 때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채용한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던 셈입니다.


강력한 죄의 세력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화해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로 그대들을 권고하고 간청하지 않을 수 없도다!”


사도는 이렇듯 자기 자신의 마음의 깊은 관심을 표현할 때 가장 강력한 탄원의 열심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자신의 권고와 간청을 받는 이들에게 그들의 복락을 위해 권면하고 설득하는 자신의 그 열심이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는 일임을 밝히는 일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간청하고 있는 자신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 곧 하나님께서 직접 간청하시는 말씀임을 그들로 깨닫게 하려 하였습니다


온 우주에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이 있습니까?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영원한 구원의 잔을 친히 손에 드시고 죄인의 마음 문을 두드려 열면 들어가시겠다 간청하시는 모습이라니요! 단번에 멸망의 구덩이로 던져버렸어야 마땅한 벌레 같은 죄인들의 마음에 들어가시려고 그토록 간절하게 애원하시다니요.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를 모독한 그들은 정말 멸망 받아 마땅한 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순간에 멸망시키셔도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은 한 점도 흠이 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긍휼을 받으라고 먼저 간청하시다니요. 끝없는 고집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며 설득하시고 기다리시는 그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 하늘이여, 놀랄지어다! 하나님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자비하심에 놀랄지어다! 여기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극치 앞에 사람의 절망적인 부패를 놓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멸망할 수밖에 없어 아무 소망도 없는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길 원하여 간청하시는 그 놀라운 정경 속에서 최고 절정에 이릅니다


그 경이로운 정경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 목회 사역은 너무나도 놀라운 직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신 대사(大使)의 직임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존귀하고 명예로운 직임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제한된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대사)’이라는 칭호와 직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세움을 받은 목회자(pastor)에게만 한정되어 적용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넓은 관점에서 이를 생각한다면, ‘사신의 직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일꾼들에게 일반으로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역시 주님께서 직접 하실 일을 대신 수행하도록 특별하게 세우심 입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들도 하늘의 복락과 평강을 사람들에게 제시할 직임을 가진 이들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역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다 그리스도의 사신(대사)들인 것입니다.


대사의 존귀함은 언제나 그를 보낸 주권자의 권세와 영광에 비례합니다. 그렇다면 왕중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되시는 분의 사신된 자가 입은 존귀와 영광은 어떠하겠습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러한 높은 존영을 입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신성한 성품을 가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대신하여 타국에 파송된 사람들이 그 지역의 공관이나 궁정에서 어떠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그는 행여 자신을 보낸 군주나 자기가 대표하는 나라에 누를 끼치는 무가치한 일을 하지 않으려 자신의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을 대신하는 자가 그러하다면, 하늘로부터 받은 심판과 긍휼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죄 있는 인생들을 설득할 직임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에 영광을 위해 얼마나 더 큰 주의와 열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목회직이라는 존엄한 직무를 감당하는 자는 그 존귀와 영광에 상응하는 마땅한 성품의 존귀함도 가져야 합니다. 이 직임을 감당하는 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하고 얼마나 필요한 일입니까!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그리스도의 사신된 내가 그 모든 행실에서 어떠한 거룩함과 경건함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내 직무에 관한한 내가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위엄하신 분을 대표하는 자라니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는가!”


복음 사역(ministry of the Gospel)을 이 대목에서 평화의 사신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역을 가리켜 사도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ministry of reconciiation)이라고 지칭하였으니 말입니다.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개념을 구상하거나 표현할 것이 전혀 없으며, 그 직책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하고 우아한 매력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만약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손에 성령의 검()만 들려 있다면, 설교자는 그 검으로 사람의 영혼을 베고 쪼개는 일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손에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화평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감람나무 가지’(8:11)가 들려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언제나 쟁투와 분쟁의 현장 한 가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고 다투는 자들을 설득하고 권면하여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직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갈등의 장소로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맺는 조약을 선포하고 그 조약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조약을 받아드리도록 강권해야 합니다.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그 죄로 인해 율법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할 마땅한 이유와 그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한 강권함호소를 통해 영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평강과 소망의 빛을 주고, 정죄감의 찌르는 고통을 가하는 양심과 화해하게 유도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이고 부패한 적대감과 선입견들을 깨닫게 하며, 악한 혈기에서 우러나오는 포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자기 이웃과 연합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설교하는 이들이 가진 임무입니다.


선지자는 복음 설교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5).


우리 구주께서는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들이 받게 될 복을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화해의 일꾼이요 평화의 설교자여, 그대는 영예롭고도 복되도다. 세상이 그대를 알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로다. 때로는 교회마저도 그대의 수고를 알지 못하도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의 그대 사역은 그 자체로 그대에게 주어진 상급이로다. 그대의 발이 닿는 곳에 평화가 싹트고, 그대가 머무른 곳에 하늘의 복락의 샘이 터지지 않는가?


하지만 복음 설교자들은 역경(逆境)의 골짜기를 걸어야 하는 사신(使臣)들입니다. 그들은 죄악적이고 교만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이들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에 승복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역자들은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무한한 하늘의 복락을 사람들에게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하늘 복락의 한없는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미각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목회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하심과 하늘로부터 오는 복락에 대한 제안들을 친밀하게 느끼는 사람들만 만난다면, 그 짐은 결코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가는 곳마다 전하는 복된 소식에 냉담한 이들을 만날 뿐 아니라 지극히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온갖 핑계를 내놓으며 혼인 잔치의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이 주님의 비유에만 등장하는게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복음 설교자들은 그들과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생각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 바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향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대상들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가진 그들이 영적으로 온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한 그들의 삶에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하지만 영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 가진 절망적인 상태와 그를 장악하고 있는 사악한 힘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목회 사역의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기 어려운 난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혀 불가능하지요.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이 번번히 그 간절한 열심과 수고를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역자들의 노고에 대항하는 사악하고 강력한 원리가 죄인들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깊이 인식하거나 바르게 숙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이 강력한 저항과 마주하는 일은 지극히 필연적인 일입니다.


바로 이 복음 사역의 난점을 주목하여 보다가 이 강론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목회 사역에 대한 간절한 열심’(earnest ministry)의 필요성을 다룰 것입니다. 복음 사역의 성공은 바로 이 간절한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부족하다면 목회 사역은 매우 중대한 부분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목회 사역의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이 클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드려져야 할 간절한 열심의 분량이 그 만큼 커져야 마땅합니다. 큰 장애물을 극복하려 한다면, 반드시 장애물의 크기를 극복할 만큼의 간절한 열심이 요구됩니다. 목회 사역이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일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하고 바르게 인지한다면, 목회 사역에는 엄청난 노력과 간절한 열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의 표현 어구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사도는 그 일이 분명하게 오직 간절한 열심히’(only by earnestness)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 본성에 관해 기록된 모든 보고서들을 취합해 보십시오. 그 모두가 목회 사역은 간절한 열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체험과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종합하여 관찰해 본다 해도, 그것은 모두 한결같이 간절한 열심이 아니고서는 복음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지는 목적들이 광대하게 성취되길 간절하게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간절한 열심 목회사역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최근 들어 우리는 학식있는 목회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학식의 부족과 같은 큰 해악으로 고생하는 일을 우리가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자주 상기하곤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모든 사역자의 사명과 그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목회 사역에 대하여 경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진영의 목소리에 동조합니다. 그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경건이 없는 목회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옳고 적절한 말입니다. ‘목회 사역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그 어떤 진리도 경건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시는 모든 징계의 저주를 다 합한다 해도 거룩하지 못한 목회 사역에 쏟아질 진노만큼이나 무시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제일의 자격이 경건(Godliness)’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놀라운 재능과 깊은 학식, 뛰어난 웅변술도 목회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경건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가지는 재능을 경건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겼던 때는 언제나 어둡고 악한 세대였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로서의 경건한 성품과 재능, 학문적인 학식을 겸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대 강단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이며, 거의 모든 교회 시대에 요청된 것이기도 합니다.


British Quarterly Review라는 계간지(季刊誌)는 최근호에 다음과 같은 진술을 담은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목회 사역이 지성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는다 할지라도, 강력한 믿음과 참된 영성, 그리고 깊은 간절한 열심을 겸비한 목회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저는 이 황금과 같은 진술이 모든 신앙 고백자들이 앉은 좌석 위에, 모든 학생들의 책상머리에, 그리고 모든 설교자의 강단 위에 새겨져 모두가 그 빛을 따라 가기를 바랍니다. 이 짧은 진술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 사역의 주제와 관련하여 다루어야 할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목회자들과 학생들과 교사들이 그 진술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영혼 전체가 사로잡히고, 또 그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실에 그 진술의 정신을 적용할 수만 있다면 사실상 제가 쓴 이 책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진정한 가치와 목표는, 어쩌면 그 진술을 더 확장하여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hapter 2, 간절한 열심의 본질


인간의 활동 영역에서 사용되는 말 중에서, ‘열심을 내라는 어구처럼 흔하게 쓰이면서도 직접적인 전달력을 가진 단구적(短句的) 표현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이 표현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표현은 마음에 뚜렷한 목표확정된 뜻’, ‘의지의 결심등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인내로 부단하게 힘을 기울인다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나태함에 빠진 이들을 깨우치고 일으켜 희망을 가지고 활동하도록 촉구하거나, 그들의 영혼을 고취시켜 우리와 같은 마음의 의욕을 타오르게 하고 싶을 때, ‘열심을 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과 목회 사역의 소명(召命)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열심을 내라하신 것 말고 무슨 다른 말씀을 하고 싶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위해 강렬한 열심을 보인다면, 그 목적하는 바가 그 마음에 끼치는 인상과 영향력으로 인해 온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선택한 후,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에 자기 자신 전부를 건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아마도 그는 아주 잠시도 주춤거리지 않고 일관된 마음의 자세로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자신에게 아주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목적을 마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기 마련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의 행동 양식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목적에 맞추어 결정됩니다. 설령 그 목적과 전혀 무관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마음은 그 목적하는 바에서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목회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의 총명을 모두 동원하고 집중시켜야 할 만큼의 실로 중차대한 주제들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채용하신 인간의 정신적 공감(共感)의 법칙인 감동(感動)을 간과하곤 합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에 관해 그토록 무관심하고 멍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지요! 우리는 그들의 영혼의 회심을 위한 간절한 열심을 그들에게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그러한 열심에 영향을 받아 다음과 같은 마음의 생각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까?


저 설교자가 나의 구원을 위해 저런 간절함을 보이다니. 그런데 정작 나는 나의 구원 문제에 무관심하구나. 나의 영혼의 영원한 복락의 문제를 외치는 저 분 앞에 정작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저가 차라리 차가운 논리만을 제시한다면 그것을 반박할 논리를 내세우며 증거를 대라고 외치기라도 하겠지만, 차라리 단순한 수사적 기교나 현란한 웅변술을 과시하고 있다면 그저 조소를 보내며 스쳐지나 보내기라도 하겠건만. 차라리 자기 자신을 드높이고, 돋보이게 하는 설교라면 지금 일어나 자리를 뜨겠건만. 저 분이 보이는 나를 위한 위한 간절한 열심이라나! 그것은 견뎌낼 수 없구나. 나는 저 설교자의 모습 속에서 불 가운데 빠진 나를 끌어내려고 황급히 뻗는 팔을 보았도다.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다니. 그의 간절한 열심이 나를 승복시켰도다!”


우리는 이제 간절한 열심 목회(Earnest Ministry)’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대한 주제로 더 깊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간절한 열심의 대상 선정


첫째로, 간절한 열심은 특별하게 추구할 대상을 선정하고, 그 대상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살아있는 의식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가지 대상을 동시에 집중하거나, 그 모든 대상에 같은 분량의 마음을 쏟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마음과 생각을 분산시킬만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서(情緖)는 반드시 어느 하나의 대상을 향해 흘러 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집중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면, 차라리 우리가 어떠한 한 가지의 일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절대적 대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열심을 가진 사람에게 다른 일에 시간과 수고를 청구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기다리시오. 내겐 지금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소. 내가 매진하고 있는 그 일이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소.” 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에게 자신이 매진하고 있는 일을 하고도 남은 힘의 분량이 있다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다른 여러 부수적인 것들에 나누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시간과 노력의 주류(主流)는 여전히 한 통로로만 흐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큰 물레방아 바퀴를 돌리기 위해 거기에 끊임없이 물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열심을 가진 이를 보며 의아하게 여기며 심지어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다른 이들의 평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일이 가진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열심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결연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행동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목표하는 것에 이르는 정로를 이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목표하는 대상이 언제나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은 그 목표에 당도하기 위하여 들이는 수고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쏟아 부어야 할 수고와 노력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역자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한 목회자는 자신이 받은 직임의 본질과 목적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목적을 자기 자신의 마음 가장 높은 곳에 두어 다른 모든 대상과 그것을 확연하게 구별시킵니다. 그렇다면 그가 최상위로 여기는 절대적인 목적의 대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사도의 함축적이고 엄숙한 어법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淸算)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13:7).

 

짧지만 장엄하고 외경스러운 이 문장 안에 목회직의 엄숙한 목적과 목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강단을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는 십자가를 세우신 의도와 일치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던 우리 주님의 그 위대한 목적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신(使臣)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대속(代贖)하신 영혼들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부수적인 다른 모든 일을 성취했다 할지라도 영혼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목회는 그 본질이 가진 가장 큰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된 자들로서 가져야 하는 참된 열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일꾼의 의무를 완수하겠다는 결연한 긴박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무를 실제로 수행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에 제시될 수 있는 목회직의 여러 목적과 의무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의무들을 마음의 저울에 달아 보아 영혼 구원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소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확고한 지성적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영혼을 지키는 자로다!’라는 엄중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라야 비로소 목회의 사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목회의 사명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목회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불확실성의 오류로 혼란에 빠지지는 일이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목회직이 가지는 여러 세부적인 특성들이 목표하는 바를 모두 함축하는 포괄적인 어구입니다. 회심하지 않는 자들을 각성시키고, 영혼 구원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우고, 복음을 가르치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의 성화(聖化)를 촉진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 등은 모두가 영혼 구원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은 곧 영혼 속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전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그러한 은혜의 특성 중 무엇보다 가장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회심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시급한 사항입니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그의 책 참 목자상(Reformed Pastor)에 이와 동일한 요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매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회심의 역사는 우리가 쉴 새 없이 좇아야할 위대한 일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십시오. 그 비참이 우리를 향해 회심하지 않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쳐대고 있지 않습니까?........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된 자들입니다(8:23). 그들은 죄사함이나 영광의 소망에 참여하였거나 그 분깃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요? 우리가 그들을 위해 일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백스터는 계속 이어 말합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26:18). 치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다면, 누구를 더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설령 죽어가는 사람이 우리의 형제나 자녀가 아닐지라도 그를 돕기 위해 더 황급히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죽음의 문턱을 넘어 죽어 영원한 파멸에 빠지게 될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마땅한 슬픔을 느껴야 하며, 파멸로 치달아 가는 그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어떠한 다른 일보다도 시급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적은 필요성을 지닌 요점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논란을 벌이면서도, 변화하지 못함으로 피할 수 없는 저주를 받을 무지하고 비참한 죄인들의 무리를 너무나 자주 방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원한 멸망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그들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다니요! 복음을 갈급하는 그들의 소리없는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비참한 죄인들을 눈앞에 보면서 어찌 그들의 구원을 위해 말해줄 것들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요? 우리가 입을 열지 않음으로 한 죄인이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혼 구원을 원하시는 구속주를 사랑함이 없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가장 큰 원수보다도 더 악하게 그들을 대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설령 많은 이들을 소홀히 한다 할지라도,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들을 소홀히 마십시오! 다른 모든 것을 지나친다 해도, 율법의 정죄와 저주 아래 있는 가련한 영혼들을 지나치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어떠한 변화도 중단도 없을 가공할 지옥의 형벌을 매시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망의 잠을 자고 있는 그들을 향해 일어나라외치십시오! 그들을 깨우십시오! 다른 모든 일에 실패할 지언정, 영혼을 회심시키는 위대한 일은 열심을 다해 완수할지어다!”


백스터의 책을 편집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스터가 강력하고 깊은 인상으로 주목하여 사역자들에게 유념할 것을 강조한 영혼의 회심은 아무리 간절히 권고한다 해도 지나친 문제가 아니다. 영혼의 회심은 기독교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중대한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설교자들이 그 일을 위해 힘쓰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설교의 보편적인 추세를 주목해 보면, 누구나 그들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 속에는 마치 회심하지 않은 죄인이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에 관심을 기울일 경우, 목회자는 반드시 가장 먼저 회중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계층의 비율과 그 계층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목회자는 특히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가장 가련하고 위험한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 한 순간도 영원한 비참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구원 받을 만한 기회이며, 그 기회가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오늘날 목회자의 말씀 사역을 통해 회심하는 이들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 리처드 백스터의 다른 저작에서 진술된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선별된 기독교 저술가들’(Select Christian Authors)이라는 일련의 목록에 소개된 자기 무지의 비행(Mischiefs of Self-Ignorance)에서 백스터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두리뭉실한 보편적 강론이나 말씀에 대한 비평적 관찰, 호기심어린 학파들이 발견해 냈다고 하는 흥미로운 견해 등을 산뜻하고 잘 다듬어진 말솜씨로 포장한 설교를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설교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영혼의 죄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열어 회심케 하는 데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 앉아 있는 회중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말해주어야 할 시점은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이 노래와 춤을 즐길 여유가 있겠습니까? 교수형에 처해질 사람에게 위트 있는 말을 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장 영원한 파멸의 저주를 맞이할 이들에게는 거룩한 삶에 관해 책 읽듯 하는 식의 설교가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설교가 어떠한 의도를 가졌든지 간에 그들을 구원하기에 합당한 성격을 띠지 않았음에 분명한데 그런 입장에 처한 이들에게 합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회심을 통한 영혼 구원의 주제 이외의 것들은 사실상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상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는커녕, 다른 주제에 시선을 돌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채워 그들 자신들이 처한 비참에 대해 한 없이 무감각하게 만드는 설교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메마르고 활기없는 강연록을 종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설교라고 하다니요! 그런 설교자는 자기를 망하게 하고, 구원에 대한 관심과 유사해 보이는 어떤 다른 것을 행함으로 자기 일을 잘 해 나가고 있다는 의식으로 양심을 무마시키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돌봄의 짐을 벗습니다. 저런 설교내용 모두가 죄인의 마음을 열어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거나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비참한 상태를 보게 하는 데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인가? 저런 설교가 자기기만에 빠져 지옥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각성 받게 하거나, 하늘에 대한 기대에 찬 확신으로 일어서게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설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조건과 그리스도의 절대적 필연성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알게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말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그런 비참에 처하여 있는지요! 그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탐사하는 일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아니면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지 알게 하는 기술을 많은 설교자들이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시험거리가 무엇임을 알게 촉구하거나, 자신들을 점검하고 판단하는 일을 돕는 일이 얼마나 빈약한지요! 마치 그런 일은 전혀 필요가 없는 일인 것 같이 여깁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8:11).


우리가 만일 리처드 백스터의 힘있는 주장의 정신을 들이킬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얼마나 놀라운 설교자들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백스터의 그 놀라운 진술이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지게 하시옵고, 그 정신이 우리의 강론을 형성하는 주요한 틀(mould)이 되게 하시옵소서.


물론 그러하다고 이미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심령을 거룩한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또 구속받은 가정의 일원으로 태어난 자녀들을 먹이고 돌보고 인도하고 양육하여 자라게 하는데도 힘을 써야 합니다. 영생을 기업으로 얻은 자들이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게 하는 일은 신실한 목회자에게 있어서 언제나 큰 관심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심함으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곧바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과 시험과 유혹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과정이 매우 길게 지속되기도 합니다. 깊은 강론을 통해 신앙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복잡한 난제들과 위험들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내도록 지도하는 것은 목회자의 분명한 임무입니다. 목회자들은 믿는 자들이 진리에 대해 더욱 자라 온전함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회중 가운데 이미 회심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많은 수가 믿음의 초보를 체험한 적이 없거나, 실천적 경건에 대해서 마치 알파벳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들과 같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매우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수년간 출석한 교회를 떠나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몇 해가 지나는 동안 그 목회자로부터 실천적 설교를 거의 듣지 못했어요. 그 목회자의 설교는 교리적이며 신학적인 진술로 일관됐고, 설교의 대부분이 종교적인 위한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막 회심한 성도들이나,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죄인들을 향한 생생하고 신랄한 호소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회심이 일어나는 경우를 목격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 ‘간절한 열심과 전인적 집중


둘째로, ‘간절한 열심(earnestness)’이란 말 속에는, 그 사람이 주목할 주제가 정해졌을 뿐 아니라 그 주제가 그 사람을 온전하게 사로잡아 그 주제를 향하여 마음이 온통 불붙어 있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간절한 열심은 이론이나 논리적 추론 이상의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과 목적에 대한 바른 평가와 이해를 바탕으로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들을 동원하여 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부단히 매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을 위해 매진하는 열심을 가진 사람은 그 활기와 민첩함이 마치 불과 같습니다. 자신 앞에 놓인 목적을 좇는 사람은 언제나 그 목적을 생각합니다. 낮에는 그 목표를 묵상하고, 밤에는 그 목표를 이루는 꿈을 꿉니다. 그는 언제나 목표를 바라보며, 그것을 묵상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 목표는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대화의 가장 주요한 화제(話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인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의 표상이 그와 같습니다. 그것은 불멸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사역의 방식으로 본 삼아야 할 표상입니다. 그러한 목회자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고상하고 엄숙한 말씀의 영감을 완전하게 들이마신 사람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13:17).


그는 죄 있는 영혼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는데 부단히 쓰임을 받는 일을 자신의 최대의 실천적 목적으로 삼습니다. 설교 본문을 정하거나 설교문을 작성하거나, 또 회중들 앞에서 설교할 때 그는 그 점을 항상 염두에 둡니다. 그에게 있어 영혼을 구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마치 전쟁 영웅에게 있어 승리가 가지는 의미와 세력처럼 다가옵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목적으로 매우 웅변적 설교를 준비하거나 전하는 일은 그가 바라는 목적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들을 제압함으로 그 포악한 원수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나라를 해방시키려는 일념으로 불타있는 애국 충정의 전사(戰士)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는 수많은 구경꾼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군인들의 정교한 열병식이나 웅장한 퍼레이드나 호전적인 음악소리 따위에는 어떠한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는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제일의 목적만을 추구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그의 마음 전체에 새겨진 기조(基調)이며, 그가 보여주는 모든 행실의 원천인 것입니다. 무엇도 그의 행실에서 그 최상의 목적을 떼어낼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찌하든지 내가 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는 거대한 대전제 위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열심 속에 함축되어 있는 모토입니다.


. ‘간절한 열심과 방편 활용


이 세 번째 대목에서는 사역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채용되는 합당한 방편들과, 그것을 활용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곧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모든 합당한 방편들을 궁구하고 그것들을 부지런히 활용하는 문제입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인 형식이나 단순하게 고정된 틀에 얽매이는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표 수행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편들과 수단들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아 실패와 성공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에 있어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근거로 삼습니다. 자신이 이제 더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일을 위해 어떠한 방편을 사용할지를 부단하게 탐문하며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고 새로운 방편을 구축하려 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꺼질 줄 모르는 열정과 결연함을 가진 그는 언제나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이 목적을 반드시 수행할 것이다! 이를 위해 더 좋은 방편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우리 목회자들이 영혼 구원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지는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내 목회 사역을 통해 더 큰 성공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회중은 어째서 더 증가하지 않는 것인가?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전하는 십자가의 교리로 말미암아 발휘되지 않는 이유는 어찌된 것인가? 나의 목회 지도 아래 있는 회중들 가운데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염려하며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어오는 이들이 이처럼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우리 목회자들 모두가 일상적인 목회 임무를 감당하는데 있어서 수고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지자가 했던 것과 같은 탄식을 해야 할 지경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53:1)


우리는 실제로 늘 그러한 불만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아니 더 나아가 그러한 서글픔을 토로할 만큼의 충분한 간절한 열심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회중의 규모가 늘 제자리를 유지하고, 교회 내에서의 평안이 유지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며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깊은 사색과 엄숙한 묵상과 철저한 자기 검증을 하기 위해 힘쓰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 자신의 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한 행사를 질책하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목회 사역의 효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기존의 방식을 개선하거나 교정하거나 무엇인가를 덧붙여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은가? 또한 새롭게 적용해 볼 새로운 방식이나 체계를 연구해야 할 필요는 없는가? 나의 설교의 내용이나 전달의 방식이나 자세에 있어서 보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목회적 돌봄의 과정 전체 중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 분명히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의 중대함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자주 던져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설교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와 엄중한 계시의 주제들에 대해 너무 조금 밖에는 설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많은 부분을 하나님의 가공스러우신 진노에 할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부분을 조금 더 증가시킬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나 평범한 문체와 어조로 반복함으로 복음이 가진 힘을 반감시키곤 하지 않습니까? 또 지나치게 논쟁적이거나, 불필요한 상상력을 과하게 동원하거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덕적 실천을 권고하는 형태로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우리의 설교가 이미 믿음을 고백한 신자들만을 향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회심하지 않은 이들을 각성시킬 만한 신랄한 문장이나 어조를 더 자주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희미하고 그저 보편적인 관점으로 두루뭉실하게만 묘사했다면, 이전보다 더 특별하고 분별력 있게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향한 설교를 규칙적으로 계획할 수 있고, 비슷한 주제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 했다면 또 다른 주제를 골고루 배정할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강론이 너무 지나치게 정교화되었거나 추상적인 경향이 있다면 보다 더 단순한 형태를 취하겠다 마음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보아 경솔함이 발견됐다면 이후 그런 일이 없도록 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를 깨달을 수 있으며, 너무 교리적인 설교를 했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든 진리에 대해 마땅한 바대로 가져야 할 마음과 의지를 심어주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려고 할 것입니다.


목회를 위해 주어지는 여러 수고에 대해 엄격하게 탐사하는 일은 단순히 문제를 의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비중 있고 실제적인 정규적인 과제로 여겨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직을 수행하는 목회자의 모든 활동은 우리가 가진 사명에 맡겨진 양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목회 활동을 조사함으로 그들을 돌보는 일에 나태함이나 게으름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즉시 이전의 방식들을 개선시킬 수 있는 여러 방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를 활성화시키고 성경공부 반을 개설하거나 신자들을 심방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그 개선점을 찾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목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더 나은 방편들과 방식들을 궁구해 내는 일에 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목회 활동을 돌아보아 검증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수고를 기울이는 것은 간절한 열심이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게을리 한다면 그 누구도 간절한 열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회 활동을 통해 매우 미세한 성공을 거두거나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개선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를 탐문하는 일에 냉담한 자세를 가진다면, 그것은 경건에 관련된 전체의 개념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목회자로서의 결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간절한 열심과 민첩한 적응력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모든 활동과 행위의 양식을 오직 한 가지 목표에 적응시키는 의지와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할 만한 일을 찾아내는 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사용되는 방편에 마음을 빼앗기는 어리석음 따위는 범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움직임을 연상케 합니다. 기계를 구성하는 각 부속들은 기계가 가진 용도와 목적을 위해 움직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직을 감당하는 수단으로써 주의를 기울여야 할 첫 번째 방편은 지식입니다. 이는 모든 방면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문학/과학/철학 등은 목회직에 도움을 주는 방편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어느 때라도 그러한 것들이 목회직이 가지는 목적과 같은 높은 자리로 올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부수적이고 제 2차적인 것들 자체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거나 그것들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직을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가치만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목회 사역에서 학문적 지식이 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회의 본질과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그를 위한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가 높은 지식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흠이나 탈도 아닙니다. 이에 대해 와이즈먼 박사(Dr. Wiseman)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주목해 보십시오. (‘학문과 신학의 관계성에 대한 강좌에서 인용) 기독교 신앙은 낯설고 저속한 인간적인 학식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별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는 아마도 사우스(South)가 한 말이 최선의 답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학식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라 할지라도, 우리의 무지함을 충분히 혐오하실 수는 있다.’ .....”


저는 Eclectic Review () 9월호에 게재된 하겐바흐(Hagenbach)의 저작 교리의 역사(History of Doctrines)에 대한 비평적 서평에서, 매우 정당하면서도 놀라운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목회의 사역이 빛을 발할 때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학식을 가졌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서만 일하고 싶은 유혹에 자신을 방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에게 있어서 학식의 가치를 존중하는 경우는 자신의 목회 사역에 그것이 쓰임새가 있다는 판단이 들 때뿐이다. 학식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동원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신실한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들여지는 수고와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사역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그런 식의 목표는 합당치 않다. 그러한 목표를 가진 사람에 대해 학식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 외에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겠는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우치는 일이다. 자신이 쌓아 온 학식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고 그저 더 많은 분량의 학식을 축적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나, 반대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자신들에게 유익을 끼칠만한 것들을 준비하고 획득하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똑같이 서로 다른 극단적 파행에 불과하다. 설교하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책을 읽거나 연구하는 일을 등한히 여기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좋은 의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오류 아래 처한 자이다. 물론 낮은 학식을 가진 자라도 얼마든지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유능한 목회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강단에서 복음이 가진 요소들 중 몇 가지를 따와 설교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양떼들을 지속적으로 양육하는 일에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만약 그가 스스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주제넘음으로 그가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열매 없음이다. 그가 하는 목회자로서의 모든 활동은 무기력, 단조로움, 진부함 등과 같은 유익이 없는 일의 반복에 불과할 뿐이다.”


어떠한 목회자는 성경이 가진 높은 가치를 이유로 성경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연구하지 않는다. 회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예증의 방편을 위해 전혀 연구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대한 연구는 게을리 하면서 인간적인 견해만을 연구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극단이 아닐 수 없다. 진정으로 성경의 가치를 드높이는 방식은, 성경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에 대한 분명한 확신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그 진리에 도달하도록 적용될 수 있는 방편들을 부지런히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 목회의 주요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목회 사역이 효력을 발휘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회 사역자로서 보다 높은 자질과 학식에 대한 광범위한 습득을 요구하는 현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큰 부지런함을 보이는 목회자의 수고가 무조건적으로 평가절하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수고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영혼 구원의 위대한 목적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는 절대적 전제 하에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망을 받을 뿐 아니라, 목회자로서 가진 사명과 그 소임의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보유한 학문적 지식을 거룩한 신적 예술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도구나 재료로 활용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학식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풍성하게 밝히고 힘있고 돋보이게 비추는 유용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한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학식에 세련된 표현 기법이 더해진다면 그 효과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회중을 견책하고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설교자가 효과적이지 못한 표현 방식으로 회중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효과적인 웅변의 표준을 따라 정제되고 세련된 수사(修辭) 기법으로 뜨겁고 거룩하게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그 불붙는 마음의 빛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강권하는 사랑에 사로잡힌 설교자로서, 직간접적 표현과 변증법적 방식이나 은유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사의 기법을 통하여 회중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것을 설득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강단에 선 설교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간절한 열심의 정체입니다.


. ‘간절한 열심과 개인의 경건


거룩한 직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구비되어야 할 사역자의 또 다른 자질은 사역자 자신의 신앙입니다. 이는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가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수고함으로 계발해야 자질입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지는 사람은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지성을 연마하거나 이에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신앙으로 연단하는 사람입니다. 심장의 고동이 미약하면 몸 전체의 순환이 느려지고 몸의 체질이 원기를 잃는 것처럼, 영적으로 유약한 설교자의 설교는 유약하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약해진다면, 강단에서의 우리의 설교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5:11)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는 마치 자신이 엄숙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확신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막중한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 사도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미온적인 경건함을 가진 사람, 심지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의 정통교리에 대해 얼마든지 논리적 웅변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적 웅변이 온 마음을 다해 십자가를 자랑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따스한 온기와 생명을 소생케하는 작렬하는 태양의 빛을,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그저 어른거리는 찬연만 보여주는 오로라의 섬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사역자는 언제나 이중적 관계를 견지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중적인 의무가 존재합니다. 세상에 대해 우리는 설교자이며, 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목회자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분량이 크지 않고서 그러한 막중한 책무들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교회를 맡기신 성령께서는 영적 감독자로서의 직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도들의 지식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룩과 사랑과 영성 모두를 증진시켜 그들로 하여금 여러 분야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돕고, 그들이 거룩을 위한 모든 은혜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보십시오. 희망 있는 영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경건한 눈을 가진 이들의 눈에 한탄스럽게 보이는 모습들을 얼마나 자주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서 신실한 열심과 세상적 사고방식의 기괴한 조합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교회와 세상을 구분짓지 못할 만큼 가라앉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침체로 더 급속하게 일어납니다. 강단의 설교외 경건한 책을 통해 전해지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과 심령 속에서 드러나는 일은 이제 매우 희귀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람들의 영적침체를 어떻게 치료할 것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오늘날 경건의 정신을 다시 고양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니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질문하면, 오늘날 교회를 잠들게 한 무기력한 정신은 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러한 무기력함이 강단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심령의 부흥은 다시 강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간절한 열심을 드러낼 수 있을 만한 설교를 하기 위한 경건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미온적인 심령을 깨워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그런 경건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앞에 주어진 시대의 환경을 생각해보십시오. 부와 지성 그리고 권력을 소유하려고 애쓰는 열심들, 자신의 외적 모습을 더 우아하게 꾸미려는 열심들. 이러한 환경, 세상의 조류로부터 교회와 신도들을 지키는 막강한 장치로 활용할 수 있는 방편은 교회의 강단입니다. 영적인 바른 안내자 없이 영적 진보를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주제넘은 신앙적 야심의 겉치레는 없습니다. 그러니 목회 사역의 효능이 감소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우리 목회자들의 경건의 부족에 기인한다는 것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부흥하는 목회 사역, 부흥하는 교회의 오직 유일한 희망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의 세 대목을 인용하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겠습니다. 목회가 그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가장 소망에 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구속 받은 존재로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사명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이 가지는 목표를 다시금 바라보는 일이다. 마음의 열정은 그러한 목표가 요구하는 위대하고 긴급한 요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굴복시킬 용의를 의미한다. 어떠한 것도 섞이지 않은 순전하고 정결한 의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순전한 의도는 목표를 성취하는데 쓰일 가장 훌륭한 방식들에 이르는 최선의 길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여기서 능력이란 무엇인가? 목표에 대한 불분명한 관점이나 나약한 목적의식의 연합으로 야기되는 모든 장애 요소들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는 능력을 말한다. 목회자는 순전한 마음과 경건을 통해 교회와 세상을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있게 하고 말겠다는 일념을 목회의 오직 유일하고 고상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정서의 흐름 전체가 오직 그 목적을 향해서만 흘러가도록 해야 하며,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대상에 자신의 힘이 분산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분명한 목회의 목표가 사역자의 힘을 장악하고, 그 목표를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일념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는데 성공하는 순간, 거룩한 번영의 새벽은 시작된다.”


뜨겁고 거룩한 열심은 그가 하는 모든 활동에 생기를 더할 것이다. 영적인 일에 대해 정통하고 익숙한 목회자는 회중들의 성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부패한 심령의 상태 그대로 영원한 심판의 보좌로 달려나가고 있는 가련한 영혼들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그러한 내리막길로 내 닫는 영혼을 붙잡는다. 또한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과 영광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중보 안에서 그들에게 제공될 풍부한 방편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영원한 내세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 시간 가운데 긍휼의 가능성을 스스로 상실해 버리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또 그에게 있어서 최상의 주제는 듣는 모든 이들의 즉각적인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엄숙한 진리이다.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결정할 이 주제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리가 아닌가! 이 진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목회자가 자신의 지각과 지성과 사고의 모든 원천을 동원해 죄 안에 있는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깨우치려는 소원에 사로잡혀 있다.”


소생함을 입은 사역자는 양떼에 속한 지체들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 매우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그는 양떼들의 믿음과 거룩에 대한 진보를 이루려는 유일한 일념으로 매우 뜨거운 관심과 자애로움을 가지면서 그들을 대할 것이다. 이를 통해 교회의 회중이 목회자가 드러내는 순전하고 위풍당당한 감화력에 끌리기 시작하면, 회중은 목회자의 걷는 경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교회의 지경을 넓히려는 목회자의 거룩한 목적에 자신을 복종시켜 그 목적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힘을 모으기 마련이다. 정서는 매우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쉽게 전이되곤 한다. 그렇다면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가 선한 목적을 분명하게 견지함으로 모든 것을 동원해 가장 높은 분량의 선을 추출해내려는 열망과 창의력은 양떼들로 하여금 얼마나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는가?”


여러분이 목회자로서의 탁월하고 간절한 열심을 가진 경건의 본과 양식을 원한다면, 저는 우리 교단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존 오웬(John Owen), 존 하웨(John Howe),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헨리(John Henry), 베이츠(William Bates), 구드윈(Thomas Goodwin). 만약 그들이 취할 수 있었던 경건이 그들 스스로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면, 저는 그들과 똑같은 경건의 열매를 얻기 위해 어떠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을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아침의 계명성이 떠오를 때까지 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며 천사와 씨름하였던 곳이 어딥니까? 저를 그 현장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 뛰어나고 거룩한 당신들이 전능하신 이의 그늘 아래서 남긴 불후의 저작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물려받은 풍성한 보배들로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그러한 영적인 조건에 있던 그들의 마음의 상태는 기독교 전체의 공동체에 매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의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누군가가 다른 이의 마음에 불이 붙게 하려면, 그 불똥이 그들에게 튀어 붙게 할만큼의 열심의 불꽃이 먼저 그 마음에서 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지근한 온기를 가진 마음으로는 어느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만한 뜨거운 불꽃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한 정도의 온기로는 오히려 사람들의 지각을 더욱 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에너지의 원천이나 그 활동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탐문하길 원한다면, 그 해답은 그들이 가진 헌신의 뜨거운 열기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그 눈부신 영광의 얼굴을 보여주었던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산 위에 거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곳에 스스로를 거하게 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체험한 그들이 설교할 때, 회중들은 마치 그들이 방금 전 본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책을 통해 정리한 설교가 아닌, 골방에서 얻을 수 있었던 생명과 능력을 드러내는 설교를 뿜어냈던 것입니다.


강단의 능력이 부흥되길 원한다면, 경건한 선조들의 부흥을 보십시오. 그들과 같이 될 수만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12:8).


Chapter 3, 간절한 열심과 목회 사역


간절한 열심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방편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나의 목적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생생하고 분명한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어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목표를 정하였을 뿐 아니라 그 목표를 위해 모든 수고를 부단히 아끼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설령 내가 정한 목표가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 실패의 원인이 나의 결심과 부단한 노력의 부족이 되게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러한 요점을 목회 사역의 목적을 성취하는 두 방편인 설교’(preaching)목양사역’(pastorate)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목회직이 가지는 여러 임무들 중에서 설교하는 일은 가장 우선적으로 내세울만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목회자로서의 우리가 추구하고 반드시 성취해야 할 위대한 목적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목회직의 목적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궁극적이며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일은 곧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사역인 것입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자가 성경 전체를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를 매우 공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능력을 겸비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계시는 직,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을 강해하고 예증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사명과 그 행하신 일을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결국 설교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적인 성격을 띠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목회 직무와 가르침은 성육신과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역,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대언의 간구를 해 주시는 중보적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성(神性), 그리스도의 재림, 인간의 영혼에 빛을 비추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직무들과 사역,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신생(新生)의 교리, 여러 은사들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 등의 항목에 대하여 어떠한 흔들림도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그리스도를 최상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모든 서신들은 한결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의무의 관계들이나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열심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이러한 의문을 던질지 모릅니다. ‘오늘날 현대의 설교자들이 그들과 동일한 가르침을 채용해야만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사도들은 영감을 받은 기독교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서신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서신서들을 해설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이 감당해야 할 주요한 임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강론하고 가르치는 내용은 당연히 그들의 가르침과 동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강론과 가르침이 철저하게 복음적이길 원한다면 더 더욱 그래야만 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적 환경이 사도 시대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질적 요소의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가 아니고 비참한 영적 죽음 가운데 처해 있는 이 시대의 영혼들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소망이 있습니까? 사도들의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한결같이 그리스도 복음 없이는 그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강론의 내용이 오늘의 변화된 사회의 환경에 맞춰야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가지는 고질적인 병폐의 독성이 시대에 따라 다른 분량으로 드러날지는 몰라도 그 악한 본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고질병에는 하나님께서 처방해 주시는 동일한 치료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서는 그들이 생명을 얻을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미신과 철학적인 군더더기를 붙이려는 시도를 자행해 왔습니다. 초대교회의 시대나 오늘날이나 말입니다. 세상의 사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는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며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2:8).


우리는 사도들이 사역을 감당하던 때가 철학의 광채와 찬란한 예술 작품들이 헬라 전역에 그 빛을 발하던 때였습니다. 사도들은 세상이 발하는 지성과 예술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유일한 목적과 수단으로 채용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단 한 번도 그 시대가 소유한 철학이나 취향이나 사회적 환경에 맞춰야한다는 저급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든 사도들이 말하는 주제는 오직 한 가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가 이 절대적인 주제로부터 이탈해야 할 당위성이나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세대 역시 영원한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강단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순전한 복음 진리에 세상적 사상의 옷을 덧입히려는 시도만큼이나 위험천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복음 진리 자체에 철저하게 배치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서려는 엉뚱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불신앙의 배아(胚芽)인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서 순전하고 단순하게 드러내야 할 증거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증거의 본질과 특성을 변질시킬 수 있는 어떠한 시도나 기대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러한 시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좀 더 가까이 접근시킬 수 있는 방편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높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패한 인간의 수준에 맞추려는 어리석은 시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원한다면, 위와 같은 사실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깊은 인상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세상의 철학이 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특효약을 희석시키거나 형이상학의 구름 속으로 증발시켜 버리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위험은 복음의 진리들을 지적으로 선양(宣揚)하려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너무 높은 지성적 수준에 맞추려고 애를 쓰곤 합니다. 오늘날 누구는 매우 지적인 설교자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어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복음 진리의 위대한 요점들을 설명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좋은 자격과 잘 훈련된 이해력을 갖춘 설교자가 되는 것은 도리어 권장할 일입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고상한 지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크게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 진리가 아닌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해 차갑고 메마른 논쟁적 토론을 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그 설교에 마음은 없고 지성만 작용할 따름입니다. 그런 설교는 그저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 이해만을 도울 뿐입니다. 회중의 정서를 일깨워 각성케 하는 수준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한 메마른 지성이 장악하고 있는 예배당에서 나오는 결과들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설교자는 예배당을 찾는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뜨거운 신앙 없이 차가운 머리의 추상력을 뽐내려고 머물러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된 회중을 이끄는 정도밖에는 산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설교란 죄인에게 전파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닌 영적인 주제들에 관한 형이상학적 강좌에 불과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하다고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설교가 엄격하게 복음 전도적 주제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의 설교의 주된 주제가 언제나 복음적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혼 구원에 깊은 영적 진지함을 가진 목회자는 모든 주제들을 복음과 연관된 쓸모 있는 소재들로 활용합니다. ‘간절한 열심뜨거운 열정의 설교자는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을 만한 주제라도 자기 영혼 속에서 불타고 있는 작렬하는 불꽃을 옷 입혀 뜨거운 복음적 열기를 품게 합니다. 그저 이성적이기만 한 설교자들이 다루었더라면 차갑고 활기 없을 주제라도 힘 있게 박동하는 뜨거운 복음의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한 설교자는 매우 보편적인 진리 체계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까지도 복음 생명의 원리가 미치도록 합니다. 강단에서 그가 무슨 주제들을 다루든지, 그의 설교는 언제나 사도와 같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설교를 합니다.


교회사는 순전한 복음 전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형식과 의식의 종교가 자리 잡았을 때, 언제나 엄청난 부패의 덩어리가 자라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혁명이 일어났던 시대들을 보면 거기에는 단 한 가지의 방편, 단 하나의 장엄한 진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은혜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회중들은 머리뿐 아니라 마음에도 무엇인가를 느끼길 원합니다. 마음의 정서에 아무런 감화도 주지 못하는 설교는 설령 논리적이고 지적이라 할지라도 회중들의 만족을 이끌어 내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요점을 딱딱한 논리적 입증 방식으로 메마른 수필을 낭독하듯 반복해 보십시오. 아니면 반대로 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난해한 이론들을 메마른 어조로 늘어놓아 보십시오. 그것은 마치 떡을 원하는 사람에게 돌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회중들은 이 세상의 것들 보다 더 높고 더 선한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인식하길 원합니다. 세상의 일로 피로한 몸과 마음에 안식을 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거룩함을 입은 정서의 유쾌함과 믿음으로 느껴지는 기쁨과 평안을 느끼고자 하는 간절함이 회중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염려와 근심과 수고로 지치고 쇠약해진 그들은 딱딱한 추상적 사변의 바위가 아닌, 복음진리가 안내하는 푸른 초장에 누워 안식을 취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강단에서 모든 지성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지성의 통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결핍으로 인해 복음 진리의 본질적 떡이 결코 시시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그 생명의 떡은 솜씨 있는 손으로 잘 반죽하여 만들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사회의 조건과 환경이 다양하다 할지라도 전파되는 복음의 본질은 동일해야 하며 설교의 내용은 일관성 있게 유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은 그 시대의 환경에 맞출 필요가 있다. 방편에 있어서만큼은 진보된 지식을 가진 세대의 환경에 맞추어 세련되고 개발되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 신학을 위한 건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되는 개념에서 나왔다면, 이는 인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인정할 때도 항상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복음의 진수가 가진 본질의 가치는 결코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복음의 본질은 그 자체의 증거와 권위로 말미암아 받아 드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고 마땅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설교의 방식을 시대의 취향과 환경에 맞추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 저는 어딘가 꺼림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철저하게 검증하고 정확하게 규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상태로 편의성의 관점에서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자칫 방식의 범주를 넘어 복음의 주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설교하기라는 표현보다 더 많은 오해와 실수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표현을 자신들이 강단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제시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항목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설교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는 당위성을 지닌 엄위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구원의 계획은 율법의 권위를 전복시키지 않으시고 도리어 더욱 굳게 세우신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마땅히 하나님의 율법의 정결함의 범주 안에서 설명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율법의 완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는 불법이며,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것입니다(3:20). 율법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알 수 없습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혐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복음과 율법을 적절하게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복음 없이 율법만을 말한다면 회중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율법 없이 복음만을 말한다면 회중들은 과감하게 경솔해지고 주제넘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처한 위험은 복음을 소홀히 하는데 있다기보다는, 복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연합시켜 설교하는 일을 생략하는데 있습니다.


목회 사역의 직임을 받은 우리가 가지는 간절한 열심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죄 가운데 멸망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에 찬 동정심의 정서가 아닙니까? 그 정서는 폭풍과 같은 발설이나 우레같은 비난의 모습으로 나타날 본성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심을 가진 정서는 엄숙하게 연단된 권고와 호소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Chapter 4, 설교 방식에서 나타나는 간절한 열심


제가 설교의 방식이라 할 때는 음성과 제스처를 통해서 진리를 전달하는 태도만이 아닙니다. 선포하는 진리와 연관된 생각의 전개와 설교의 문체를 다 포함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강단을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딱딱한 형식이나 무미건조한 방식과는 정반대인 생동감’(生動感)입니다. 설교 본문을 주의 깊게 분석하는 일이 우리의 모든 설교의 기본을 형성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설교는 단순한 성경 주해 이상의 무엇이어야 합니다. 우리 설교를 듣는 자들로 하여금 알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도 인지시켜야 하면서도 여전히 행할 것도 많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빛은 경건이 자라게 하는데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연 세계에서 식물이 자라는데 햇빛이 진수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할 때 본문 주해를 마치면 권고와 경고와 충고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의 방식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구원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함이니”(1:28).


우리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방향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 그리로 나아가도록 다그쳐야 합니다. 우리 설교를 듣는 자들은 모두 성경을 아는 것만큼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머리가 마음보다 훨씬 앞질러 가 있습니다. 설교자들의 위대한 임무는 설교 듣는 자들을 설득하고 부탁하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내키지 않으려는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를 듣는 각 죄인마다 자기 분별력이 지시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성경의 증거 뿐 아니라 자기 양심의 경고에도 등을 돌립니다. 세상의 헛된 것을 위해서 자기 불멸의 영혼의 진정한 유익을 희생시키며, 자기가 망할 줄도 모르고 미치게 벼랑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벼랑에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파멸의 구렁으로 떨어질 판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가 계시된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명하여 결론을 내려주는 식으로 설명한다 해도 그것으로 다 되었다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금방이라도 파멸시키려고 피스톨이나 독약을 손에 들고 서 있는 사람 앞에 그 자살의 죄악됨을 차가운 표정으로 밝혀주고, 그 악이 범죄임을 여러 증거들을 논리적으로 나열해 준다고 충분할까요? 우리가 마땅히 간절히 충고하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간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피스톨을 자기 머리에 대고 있는 그 팔을 부여잡아 내리거나, 아니면 입술에 대려고 하는 그 독이 든 잔을 낚아채야 되지 않을까요?


설교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일반 세속의 웅변 법칙들과 방식들을 어느 정도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사도는 자기 설교와 관련하여 정교하게 꾸미는 것을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곧 그 설교의 내용이나 방식에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인 체계와 맞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꽃다운 말씨나 번지르르한 은유로 가득찬 설교, 우아한 열변이나 깜짝 놀라게 하는 수사법으로 의인화한 설교, 공상어린 묘사나 아름다운 정경을 제시하는 설교, 간교한 논증이나 재기가 넘쳐흐르거나 근사한 예화로 가득찬 설교, 이런 설교는 그 목사를 인기 있게 만들 수는 있고, 회중의 규모를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 많은 무리의 박수갈채를 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고, 영혼의 죽음에서 구원 받게 하는 일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니 간절한 열심의 진수가 되는 것은 인위적이고 수사술적인 문체와는 반대가 되는 단순성입니다.


단순성이야말로 그 설교가 쓸모 있게 만드는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지하고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의 인증을 확보하기에 안전한 오직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하는데 그들의 비평이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강단에서 학식과 학문의 높은 경지에 있음을 뽐내는 것처럼 하는 설교자는 선한 지각을 망치는 죄를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멸하는 영혼을 돌볼 절대적 필요성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멸하는 영혼을 파수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부단하고 지속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두리틀(Doolittle)목사의 설교 투의 말은 거칠어 보이나 힘있는 말입니다.


영원을 내다보며 주시하는 눈을 가지게 되면 우리 목사들은 서재에서 그처럼 무거운 비중을 가진 메시지를 전할 준비를 위해 수고하고 근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영원한 문제들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설교하다니 엄청난 일이죠.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말을 평이하게 하여 회중 가운데 가녀리고 연약한 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사람도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에 필요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평이한 말로 해야 그가 감동을 받습니다. 그 영혼이 저주를 받느냐 구원을 받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뜻하고 목표하고 겨냥해야 하는 바입니다. 예를 들어, 왕이 어떤 정죄 받은 사람에게 동정심 있는 어떤 이를 보내어 네가 용서 받으려면 이러저러하면 된다라고 일러 주라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보냄 받은 사람이 그 죄수에게 왕의 사면(赦免)을 받아 낼 조건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 불쌍한 죄수는 왕이 제시하였던 사면의 조건을 이행하지 못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 거만하고 콧대 높은 그 메신저가 군왕의 메시지를 전하기는 하였는데, 그 정죄 받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멋진 영어로 자기의 숙련된 기술을 뽐내는 방식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현대의 강단에 가장 크게 부족한 요소들 중에 하나는 강력하고 웅변적인, 그러면서도 단순하고 꾸밈없는 진솔한 권면입니다. 위대한 비국교도 선진들, 클락슨(Clarkson), 두리틀(Doolittle),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존 하웨(John Howe), 존 오웬(John Owen), 베이츠(William Bates), 플라벨(John Flavel) 같은 이들의 설교문들을 읽어 보십시오. 특히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설교를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강론속에서 적용 부분에 나오는 압도적이고 설득력 있는 모든 권면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위대한 사람들이 자기가 말한 모든 것을 있는 힘을 다해서 강조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통회하는 양심의 각성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보십시오.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뉴저지의 데이비즈(Davies of New Jersey), 파슨스(Parsons), 촤머스(Dr, Chalmers)의 설교들을 추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지들’(Marks of Love to God)이라는 로버트 홀(Robert Hall)의 설교, ‘우리 등불이 껴졌도다’(Our Lamps are Gone Out)라는 제목의 브래들리(Bradley)의 설교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런 설교들에 나오는 이 권면 형식의 정제된 견본들을 추적해 보십시오. 이는 듣는 자의 마음과 양심에 진리의 총체적 힘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화해하라고 사람들을 종용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를 할 때의 간절한 열심입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강론하고 있는 진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듣는 회중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고, 자기가 말하는 것을 믿고 있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난다 합시다. 곧 자기 회중들이 멸망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확언하고, 그들을 설득시켜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간청하느라 애를 쓰고 있음을 확언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드러난다 합시다. 그래서 그 설교가 친밀하고 요점이 있고 사람의 개인, 개인에게 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합시다. 그러면 강론 전체를 통해서 설교자가 이해를 통해서 점점 더 회중의 마음에 가까이 친밀하게 접근하여 결론에 이르고 있다고 회중들이 느끼게 됩니다. 그 때 결국 그 듣는 회중은 신비롭고 항거할 수 없는 권세로 자기를 불들고 있는 설교자의 손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구원과 천국에 대한 뜻을 가질 것인지 아닐지 결국 다그치고 있는 그들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선한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분별력을 가지고 뉘우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설교자들의 설교 방식을 우리가 판단해 보면, 어떤 설교자들의 절대적인 이유가 분별력을 가지고 죄를 뉘우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그러나 그런 뉘우침이 있으면 당연히 마음도 설득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뉘우침이 계속 효력을 발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그 뉘우침을 독특한 목적으로 삼고 수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특이한 기술을 가지고 그 뉘우침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주요하게 일하면서 쓰는 방편과는 다른 도구를 써서 그 목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뉘우침대로 주님 안에 들어오도록 강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잔치를 벌여 놓고 불쌍한 자든 궁핍한 자든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장을 보냈던 주님의 종들에게 지시된 방식이었습니다. 바로 이 강청함에 있어서 우리가 모자란 것입니다. 간절한 탄원, 죄인을 끈덕지게 붙들고 그 사람의 구원이 우리에게 있어서 간절하게 열심히 바라는 소원의 목표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정말 우리가 비통하게 절망할 것이라고 느끼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이 바로 그 강청함입니다. 간절한 탄원이 모자란 것입니다. 죄인을 부여잡고 당신의 구원이 우리의 간절하게 열망하는 우리의 목표라고 느끼게 만들고, 만일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정말 비통하게 낙담할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이 강권함이 정말 우리에게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Chapter 5, 여러 설교자들이 보여준 간절한 열심의 본보기들


여기에 뽑힌 설교의 방식(manner of preaching)에서 간절한 열심의 본보기가 될 실례들은 간절한 열심의 본질을 예증하고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인용문은 두리틀(Doolittle)목사의 설교에서 뽑은 것입니다(런던 월가의 성 알페이지(St. Alphage) 교회의 목회자). 그는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설교에 있어서도 능력이 있었고 열매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목회직에서 추방당한 후에 목회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교육하였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아침 경건의 실천’(The Morning Exercises)이라는 존귀한 연속 강론집에 들어 있던 것입니다. 그 설교 강론의 제목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으로 영원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였습니다.


영원한 상태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쁨이나 고통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미친 듯이 날뛰는 세상의 맹목과 광분과 어리석음을 충분히 슬퍼할 수 있으며, 이성과 영원히 존재할 영혼을 소유한 자들이 시간 세계에 속한 일들에 너무 바쁘게 몰입되어 있는 그 불합리성을 누가 충분히 슬퍼할 수 있습니까? 그런 현세의 일들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며 현세의 명예와 즐거움과 유익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들을 소홀히 하면서도 그런 시간 세계에 속한 일들에는 몰입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 그들 앞에 있습니다. 영원한 기쁨을 소유하느냐 영원한 고통을 당하느냐는 바로 각 사람 앞에 당도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쌍한 죄인들은 어떻게 하면 그 영원한 고통을 피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을 방안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이성을 가지고 이 세상의 부요를 얻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하늘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 있는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화()는 피하려 하면서도 영원한 비참은 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현세에서 고통이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영원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꺼버립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늘에 있는 보화를 추구하려는 열심을 갖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잠시 주어지는 이익에 생각이 가 있습니다. 온종일 그들이 무엇을 합니까? 그들이 그렇게 수고하고 돌아다니면서 힘써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가장 수고로운 산업과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안타깝습니다!


, 주여! 제 마음의 강퍅함을 용서하소서. 그 어리석음을 보고 더 이상 슬퍼하지만 말게 하옵소서. 선하신 주님이시여, 제 속에 긍휼이 없음을 용서하옵소서. 그 불멸의 영혼들을 바라보고 더 이상 탄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제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될 일들에 온통 바삐 움직이는 그 정신 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타하지 않는 저를 용서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를 불러 탄식하라 요청합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슬퍼하고 탄식하라 요청합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한 상태에 이르게 지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으신 본질적인 목적을 전혀 생각지를 않고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합시다.”


, 땅에 있는 성도들이여, 그대들의 눈이 열려 눈멀어 속임 받고 있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대들은 정말 비통한 심정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대들의 머리로 물 샘이 되게 하고, 그대들의 눈이 눈물의 강이 되게 할지어다. 그 영원한 기쁨과 하늘의 행복을 만홀히 여기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할지어다. 그대들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냥 죄 가운데 있다가 시간 세계를 떠나 비참한 영원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대들의 심령이 연민으로 괴로워하지 않는가? 그대들이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면서 눈물을 다 쏟아버렸는가?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기괴한 미치광이 짓을 하고 비할 수 없는 어리석음에 처한 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수 있다니 어찌된 것인가?”


다음에 소개할 글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의 것입니다. -그의 목회 사역 아래서 두리틀(Doolittle) 목사가 회심.


, 선생들이여, 복음이 말하는 것은 하찮은 것들이나 사소한 농담거리가 아닙니다. 그 주제의 거대함이 우리의 이해력이나 정서를 훨씬 뛰어넘어 정신을 잃게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아주 가볍게 취급할 정도로 우둔해졌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자신이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기쁨 속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지 고통 속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지, 또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요! 그런 생각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 어떻게 그냥 잠을 계속 잘 수 있는지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수고하고 있을 때 그런 생각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몰려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그런 큰 일을 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는지요! 그런데도 마음이 평안하다니 정말 기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영원한 위로의 근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먹고 마시고 쉴 수 있는지요! 이 중차대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 사람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시체입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들으면서도 두려워 떨기 보다는 잠을 청할 준비를 어떻게 더 할 수 있는가요? 이 영원한 자기 상태에 대하여 깊이 마음을 쓰지 않고도 어떻게 일어나고 눕고 할 수 있는지요? 그런 조재가 사람인가요, 아니면 진흙더미인가요? 세상일을 좇으면서도 구원이냐 저주냐의 그 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임박해 있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선생들이여, 땅에 있는 성도들이 그와 같은 비중 있는 문제를 위해서 더 정진하거나 더 많은 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적게 밖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다니 정말 기이한 노릇입니다. 매일의 기도에서 자기들의 영혼을 쏟아놓지 않으며, 하나님께 더 사로잡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계산할 날을 준비하는 일에 보다 진지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천 번도 더 주밀하지 못합니다. 현세의 영예보다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려고 더 수고하고 진력하지 않습니다. 또 제 자신도 둔하고 부주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느슨하고 무익한 삶의 경로를 따라가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는 설교 모두가 주님 앞에 부끄럽습니다.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저를 보내신 이가 누구시며, 제 설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구원과 저주가 달려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진리를 하찮게 여기고 사람들의 영혼도 그렇게 하찮게 여긴 내 행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면 어쩔까 하고 두려워 떨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했더라도 그들의 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까하여 두려워 떨 뿐입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엄숙한 귀추가 달린 문제들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한 마디 말이라도 반드시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며,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간절함으로 해야 마땅하지요. 우리가 책망하는 그 죄를 자신이 짓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혼자 있거나 여러 사람과 함께 있거나 우리의 종말이 어떠할지 항상 유념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이든지, 아니 모든 일 속에서 종말을 생각하고 그 일에 비추어 생각하고 행해야 마땅합니다.”


다음의 인용문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목사가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하여 들어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데서 뽑은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가장 논리적이고 가장 섬세하고 형이상학적이면서도 가장 간절한 열심을 가진 설교자도 될 수 있음을 결정적으로 증거하고 예증해 주었습니다.


“1. 저는 아직도 각성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아직도 안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우리 중에 있다니,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몇 가지 요점을 간절한 마음으로 충고하고자 합니다. ‘지금보다 각성을 받고 행하기가 더 쉬울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않으면서도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에 가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어느 때에 회심할 의향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마음먹는 대로 어떻게 조정하겠으며, 이 문제에 관해서 여러분이 무슨 방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에 안일하게 있다가 이제 그 잠에서 깨어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울부짖는 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합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직도 여전히 안일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 일들을 자기 맘먹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각없이 지내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가 각성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때가 올 것이라고 희망합니까?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일을 더 잘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지금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의 필요한 감화를 더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노를 더 격발할 범죄를 짓고 지금보다 훨씬 더 죄책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의 필요성을 의식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 여기십니까?”


“2. 여러분은 무슨 방도로 각성 받기를 기대합니까? 각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엄위로운 말씀에 관하여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그 은혜의 방편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의 처지에 있는 자들을 향한 엄숙한 경고에 관하여 자주 들었고, 지금도 때때로 듣고 있습니다. 무서운 섭리로 말미암아 각성 받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감동 받기를 기대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으려 합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통하여도 여러분이 전혀 변화가 없음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구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게 될 때에 감동을 받겠습니까? 그런 식의 기대는 여러분에게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의 보배롭고 불멸하고 비참한 영혼에 대한 위대한 관심을 격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방도로 각성받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숙고해 보십시오.”


지금 각성 받은 자들 중에도 구원 얻지 못할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전히 어리석게 각성 받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여러분에게는 그 흑암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는데 여러분은 빼놓고 지나가신다면 그 일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3. 구원을 추구하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구원을 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각하고, 그 구원을 받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때에 그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하늘에 가고 싶은 의향을 가지고 있는지 탐문해 보십시오. 그렇게 평생 안일하고 게으르고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하늘에 갈 의향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시란 말입니다.”


지옥의 저주를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항상 꺼지지 않고 모든 것을 삼킬 듯이 거세게 타오르는 그 영구한 그 불꽃을 용케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힘으로 띠 띠시고 진노로 옷 입고 나오실 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보응을 맞잡아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대적하여 힘을 내고, 하나님과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음 글은 모든 설교자들 중에 제일가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문에서 뽑아온 것입니다.


, 죄인들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마음이 여러분을 향하여 넓어졌습니다. 제가 아무리 해를 본다 할지라도, 저는 까닭 없이 저를 대적하는 사람들 모두 저와 같이 느꼈으면 하고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으면 합니다.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쫓아 보내지 못하게 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여기 이 노천에서 주님께서 은혜롭게 함께 하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머물러 함께 변론합시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아무리 하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말로 할 수 없이 귀하게 여기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가장 보배로운 피로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오, 죄인들이여, 제가 간청하노니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영접함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분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심을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니 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고, 당신의 종들을 보내시어 여러분을 따라 가며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큰길가와 산울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이런 대낮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마땅히 생각할 바를 여러분은 듣고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여러분 모두의 피에 대하여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 제가 마치 율법적인 설교자인양 지푸라기 없이 벽돌을 구우라고 여러분에게 요청하였다고 저를 고소하며 둘러씌울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가 성자가 된 다음에 하나님께 나오라고 종용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저는 여러분의 구원을 여러분이 소원할 수 있을 정도의 값없는 차원에서 제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화, 그리고 영원한 구속을 제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를 믿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다른 모든 복락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만일 여러분 자신이 나야말로 죄인의 괴수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것이 여러분의 구원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응대하여 말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부여 잡기만하면 그런 것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을 읽어보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자애롭게 대하셨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도망쳤고 부인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배반자들에게 가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형제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이르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모든 긍휼에 풍성하신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위대한 인자하심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창기들도 오시고, 세리들도 오시고, 정말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포기 당한 죄인들도 오십시오. 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온 세상이 여러분을 비웃고 여러분을 밖으로 내 쫓는다 할지라도, 결단코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일으켜 세울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기이하고 무한히 자신을 낮추신 사랑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당신 자신의 형제로 부르시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가 없이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듣지 않았다가 지금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영혼들이 무어라 말하고 싶겠습니까! 이 큰 무리 중에 어떤 사람도 나는 저주 받기에 합당치 않다라고 감히 말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지금 현재 이 세상에 남아 있고 다른 자들은 죽어 취함을 당하여 가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값없이 베푸시고 또 우리를 향하여서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증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회개하는 자가 있어 하늘에서 기뻐하시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이 들판에 있지만 복된 천사들이 우리 위에 지금 날개를 펴며 날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천사들이 여러분이 회개하면 찬송을 부르려고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처럼갈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여러분의 귀에 오늘 이 시간 들려주시는 말씀이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선한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제 설교에 깊이 청종하는 것은 주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진리로 함께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이상에서 예로 든 인용문들은 제가 간절한 열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제가 최선을 다하여 선별하여 골라낸 어휘들을 동원하여 묘사한 것보다 더 잘 예증해 줄 것입니다.


설교에는 성경 주해가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적용도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여 강해하는 것도 있어야 하며, 강해를 하되 그 강해한 것을 권면과 충고 형태로 적용하는 일도 있어야 합니다. 듣는 자들의 마음이 인상을 받고 양심이 각성을 받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지에 대한 판단도 서야 합니다. 아직 믿지 아니하는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덕을 세워주기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의 감동적인 긴장이 조금 덜하더라도 충분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교육을 위해서 그런 방식이 더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적인 목회 사역 가운데서 죄인들을 회심케 하는 부분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의 설교를 작성할 방안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모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용한 그 사람들만을 우리가 모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 강렬한 간절한 열심의 정도에 관한 한 좋은 모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생각,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문체의 발랄함과 복음적인 정서,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는 지혜, 적용을 구체화 시키는 일, 특별히 사람의 느낌을 강화시키는 면에서 그들을 따라갈 자들을 어디서 만납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회중들에게 설교할 때, 그저 단순하게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말을 듣고 있는 그 사람들이 멸망의 포구를 향하여 가고 있는 불멸의 영혼들을 그 파멸에서 건져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설교하는 그 즉석에서 회심의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또 그 큰 회심의 일을 이룰 것 같은 기세로 설교하였습니다. 마치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의 영원한 운명이 자기들의 그 일에 달려 있다는 의식으로 설교하였습니다. 마치 그들은 자기들의 설교를 마치고 나면, 즉시로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당하여 자기들이 한 설교를 직고하게 되어 있다고 느끼듯이 설교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에는 능력이 있었고, 마음을 탐사하는 호소가 넘쳐났습니다. 바로 그 점이 오늘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부족합니다.


특별히 제가 소개하는 그 모든 인용 글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 설교들이 회중의 개인 하나 하나에게하는 소리로 들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논의를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들에게 호소하는 말씀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주의력을 계속 집중시키고, 설교자와 그 회중들 간에 긴밀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자주 여러분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서 각자가 그 설교자의 강론이 바로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충분하게 가까이 가 있지 못합니다.


옛 성직자들의 문체나 논리의 양식을 본 받으려하기 보다는 그들의 마음속에 가졌던 그 강렬한 간절한 열심을 본받으십시오. 저는 현대인의 사고구조가 아니라 현대인의 마음의 상태를 이 위대한 마음을 가졌던 그들, 곧 설교한 것을 책으로 낸 그들 설교자들의 틀 속에 집어넣고 싶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증거하는 진리를 구체화시키는 능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과 친밀하였으며, 영혼을 보는 그들의 관점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선명하고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역에 참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원활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역의 목적의 여러 외경스러운 역할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복습하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Chapter 6, 설교 전달에서 나타난 간절한 열심의 본보기들


탁월한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웅변가를 가장 탁월하게 만드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전달’(Delivery)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성스러운 사람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목사가 죽은 후에 그의 책상 위에서 접혀져 있는 한 메모지가 발견되었습니다(그 목사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던 어떤 성도가 준 것). “목사님께 몇 줄 적어드리는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지난 주일 저녁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설교로 하나님께서는 제 영혼에 복을 주셨어요. 제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목사님의 말씀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의 태도였어요. 목사님 속에서 거룩의 아름다움이 보였는데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었어요.”


이는 한 설교자의 설교 태도에서 나타난 그 간절한 열심이 설교자의 말을 듣도록 회중의 관심을 끌었던 일만 설교들 중에 한 경우입니다. 설교자로서의 그의 태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설교하는 내용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웅변의 힘은 우리 본성의 여러 원리들 속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웅변이란 적확한 언어 구사로 전달하려는 개념을 귀를 통하여 생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호감을 주는 어조와 조절된 음성으로 정서를 일깨우는 것도 들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훌륭한 웅변술이나 아름다운 몸짓의 동반여부와 관계없이 제 길을 가기 마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그 진리에 주목하게 하고, 그 진리를 그 진리답게 생각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훌륭한 웅변이나 그 진리에 부합해 보이는 품격있는 몸짓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진리가 사람의 마음에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듣기 좋게 말하기 위해서 좋은 음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열심을 가지고 말하는 데는 반드시 좋은 음성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이 없더라도 불멸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불타는 열심의 간절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정말 훌륭한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으나 생명력과 감정이 모자란 사람보다 더 강렬하고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능란한 연주자는 악기가 나빠도 좋은 악기를 가진 미숙한 연주자보다 더 훌륭한 음악을 연출해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가르쳐 줍니다. 만일 우리가 이 목표를 성취할 마음의 결연한 자세만 있다면, 웅변을 통해서 부족을 채워주고 여러 흠결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능력 있고 효과적인 강단 방식을 얻기 위해서 이 웅변의 황태자가 쏟아 부었던 수고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들인 적이 있습니까? 그는 효과적인 연사가 되기 위해서 온 힘을 쏟았습니다. 헬라나 로마의 웅변가들도 그들의 야심이나 애국주의의 자극을 받아 그처럼 많은 연구를 하였고, 자기 발전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면 우리는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높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 할 수 있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놀라운 능력 중 많은 부분이 설교하는 그의 음성과 몸짓에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설교문이 가진 본질에 합당한 발성’(發聲)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였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그 음성은 정서(情緖)로 떨렸으며, 강렬하면서도 충만하다가는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다시 잦아들곤 하였습니다. 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애소(哀訴)하고, 이내 다음 순간에는 사람의 양심을 전능자의 날카로운 화산처럼 호소로 찔러대었습니다. 한 번은 죄인을 향한 격한 동정심에 눈물을 쏟아내고 그러다가는 곧장 그 죄인의 죄를 대적하는 불타는 의분(義憤)의 격정(激情)을 토해냈습니다. 그의 손짓이나 몸짓 모두가 그의 비할 수 없는 웅변을 보조하고 그의 수고하는 영혼을 돕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도 갈채를 받기 위해서 인위적인 수사술(修辭術)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를 깨닫는 각성이 일기를 바라는 불타는 간절함의 표시로서 그런 것이 나온 것입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뇌하는 마음의 즉각적인 분출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회의적(懷疑的)이고 따지기 좋아하는 흄(David Hume)같은 사람에게는 신앙고백을 간청하는 웅변이었으며, 그 웅변은 정말 20마일을 걸어가서라도 들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불신앙자 볼링부로크(Bolingbroke)마저 관심을 가졌고, 차갑고 믿으려 하지 않던 플랭클린(Flanklin)으로 열광하게 만든 그의 웅변이 어떠한 것이었겠습니까? 잠자는 족속을 무감각하고 미지근한 상태에서 일깨워 새 생명을 불어넣었고, 죽어가는 경건을 다시 살리는 그러한 강론들 속에서는 어떤 사변적(思辨的)철학이나 공교한 논증이나 형이상학적 논거(論據)따위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강단 웅변의 산품들은 그런 형식을 띈 적도 없고 그런 형식을 띌 수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사상(思想)들이 내뿜어지고 불타는 낱말들이 쏟아져 나옴을 볼 것입니다. 죄로 즉었던 수 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그 기이한 음성의 마술을 통해 살아났습니다.


리버풀의 스펜서(Spencer)목사.

강단에서의 그의 재능은 견줄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범한 젊은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고 위엄에 찬 웅변’, 단순하면서도 때 묻지 않은 간절한 열심의 방식으로 복음 진리의 장엄한 교리들을 선포하였습니다. 정말 열중하는 표정과 모습으로 증거하여 현대에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자로 회중을 이끄는 매력을 산출하였습니다. 스펜서 목사가 죽은 후에 출판된 책들을 읽어보면, 설교들에서 특이한 재능이 번득이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고, 또 그 용어를 통상적으로 쓰는 방식에 있어서도 어떤 고상한 웅변이나 심오한 사변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대단한 상상력이나 그 문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매 단계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교리를 만나게 됩니다. 남자다운 열정과 분명하고 명료한 언어로 그 교리들을 선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주심 속에서 그가 얻은 그 성공을 무엇에 돌려야겠습니까? 그처럼 수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게 된 그 성공을 무엇에 돌려야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설교하는 그 사람의 태도에 매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간절한 열심속에 있었습니다. 결단코 심오한 사상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말의 흐름이 항거할 수 없는 도도함을 드러내어 설교 듣는 자들을 몰아갔습니다.


캐터링의 톨러(Toller of Kettering)목사.

그 사람의 경우 역시, 설교를 통해 산출된 효과의 많은 부분의 원인을 그의 강설 양식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설교가 가져온 효력은, 격렬하게 큰 고함을 치는 것이 간절함깊은 인상의 본질적 요소가 아님을 증거합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그의 전체의 표정은 그처럼 조용하고 차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처럼 엄숙하게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Hall)목사는 톨러 목사의 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동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어서 내가 들어본 설교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전체 회중이 설교단 아래 회중석에서 촛밀처럼 녹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내 자신의 감정도 여러 차례 격한 상태로 감동되었다. 설교문을 위해서 정교하게 준비된 것도 없었고, 어떤 특이한 열정이나 강력한 어조도 없었고, 애처로운 상상력을 일으키도록 공교하게 꾸며 말하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고 제압당하는지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대중적인 웅변으로 이러한 일이 늘상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렵겠지만, 톨러의 설교의 대부분이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는 여러 표증을 지니고 있다고 확언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옛 시인의 진부하나마 가치 있는 교훈이 언제나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네가 나를 울리고 싶으면 네 자신이 울라.” 공감(共感)이야말로 연사의 가장 강력한 보조수단입니다. 강력한 정서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이 없습니다. 설교자가 애수(哀愁)에 가득찬 떨리는 어조로 말하고 그 입술은 뒤틀어지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가운데서 회중에게 말하면 회중도 대번에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회중이 진지해지기 마련이며, 감정의 격발을 받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주제의 가치에 흥분하게 됩니다.


참된 정서는 도덕적인 주제이든 종교적인 주제이든 간에 말하는 사람의 말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순전한 정서가 없으면 가장 잘 균형 잡힌 장중한 웅변적 진술도 마음에 감동을 주는 데는 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귀에는 아무리 아름답게 들려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 설교의 구성이 탁월하고, 음성이 낭랑하여 마치 음악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마음의 열정이 보이지 않고 그저 차갑고 조용하다 합시다. 그렇게 정서가 빠지면 아무리 좋은 말도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는 재능도 부족하고 어떤 의미에서 덜 웅변적인 사람이나 그의 어조나 표정이나 방식에 간절한 열심의 느낌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설교자의 마음에서 나와 우리 마음을 일깨워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합니다. 영원한 진리의 정말 엄숙한 실체,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위험과 운명, 그리고 하늘의 영광과 지옥의 고통의 문제를 말하면서 너무나 차갑고 아무 정서도 없이 말하는 설교자가 있다고 합시다. 마치 과학을 강의하는 한 사람이 자연사(自然史)의 여러 사실들을 강론할 때에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한 주제들을 말한다 해 보세요. 그런 사람의 강론을 듣고 감동받기 쉬울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어떤 목사가 연극배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상력으로 그려낸 내용을 가지고 연기하는 당신의 그 일이, 정말 사실을 가지고 말하는 우리의 설교보다 훨씬 더 많은 효과를 산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질문을 받은 배우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꾸며진 일을 마치 사실처럼 연출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정말 사실인 것들을 가지고 마치 꾸며낸 것처럼 설교들을 하십니다.”


똑같은 일률적 음조로 졸리게 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 마치 자기가 꾸벅꾸벅 졸게 하려고 딸랑딸랑 종을 울려 잠들게 한 사람을 그 잠에서 깨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듯이 말합니다. 그런 설교가 영혼의 가치를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그가 영혼에 대해 간절한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그 영혼들을 부지깽이가 불타는 곳에서 재빨리 끄집어내듯이 그 영혼들을 건져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습니까? 누가 그런 이의 말을 신용하겠습니까?


간절한 열심의 방식이라는 말은 전하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을 설득하고 간청하고 탄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강력한 급류처럼 우리를 쓸어갈 때에만, 우리가 다루는 그 큰 주제에 합당한 태도로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위대함을 실감 있게 느낄 정도가 되지 못하면 냉담한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에 살아있는 활기가 넘치면 그것이 수사학의 열심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의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기술로써가 아니라 새롭게 된 성품의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의도된 열심이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감동을 받게 하려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러 짐짓 군중을 모으고 박수갈채를 받아내려고 궁리하다가 나온 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려는 간절한 태도여야 합니다. 바로 이 목적으로 위해서는 우리가 어떠한 방편이든지 채용하고, 우리가 어떠한 방책을 써서라도 서툰 연설의 여러 난점을 해소하고, 우아한 웅변의 이점들을 확보해야 합니다(그러한 일들은 매우 합법적입니다). 그러니 항상 강력하고 효과적인 강단연설의 기초는 깊고 열렬한 경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빠진다면 공중 앞에 나타나서 대단한 연설을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나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코튼 마더 박사(Dr. Cotton Mather)는 말로 할 수 없이 큰 가치의 저작, 목회 지망생과 설교자(The Student and Preacher)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잘 준비된 설교를 그렇게 좋지 않은 발음 때문에 효과가 절하되는 것을 보면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므로 모든 공허하고 무의미한 소리를 피하고, 모양 좋지 않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말고, 우스꽝스러운 것은 다 피해야 한다. 그러니 강단에서 신중하게 생각하여 말하도록 하라. 문장 안에 있는 어휘의 강약 발음을 잘 지키라. 그 단어마다 고유한 강세가 있으니 그것을 잘 살리도록 하라. 이런 점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어조는 매우 분별없는 행동이고, 구름 속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니 시작할 때 어조를 너무 높이 하지 말라. 항상 힘 있게 결론을 맺으라. 설교할 때 노트를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면 그것도 필요한 셈이다. 유명한 웅변가들 중 몇은 그렇게 작성된 문서를 가지고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문서로 작성된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작성된 것을 그대로 낭독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항상 말하는 분위기와 활기를 견지하도록 해야 한다. 그 적어간 것을 지루하게 읽음으로 듣는 회중의 주목을 상실하여서는 안 된다. 강단으로 기록하여 가지고 간 것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회중은 여러분이 읽는 것을 모두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써가지고 올라가는 것을 가이드 정도로만 삼으라.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화살을 날려야 할 것인지 그 경로를 보기 위한 가이드로만 활용하라. 그래서 시선은 여러분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머물게 하라. ‘간절한 열심을 가진 자답게 부릎 뜬 눈의 활기로 다음 날릴 화살을 쏘아 붙이라. 그리하여 듣는 회중이 진리를 잘 즐기도록 하라. 그래서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토하는 열변이 듣는 자의 양심에 생생한 충고로 들리게 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호소하는 것이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양심에 꽂히게 하고, 그리고 불타는 설교자의 손에 넘겨진 그 위탁물이 듣는 회중의 가슴속에 있게 하라. 그러한 화염 속에서 일을 놀랍게 행할 수 있다.”


설교하는 것의 주제와 관련하여 기도의 내용과 태도에 대하여 적당하게 숙고할 수 있습니다. 그 두 사이에는 긴밀하고 명백한 연관이 있습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지고 증거되는 설교들이 간절한 열심의 기도와 연관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양떼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간청하는지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고뇌하면서 탄원하는 간구를 듣습니다. 깊은 애정과 깊은 영혼을 위한 염려로 가득 찬 간구가 회중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 다음에 행해질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하도록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예배의 각 분야와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과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과 우리가 드리는 기도들이 다 합하여 설교의 주제에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관성 있는 통일성을 갖추게 하고, 그 교회의 성소에 엄숙한 효과를 집중시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는 이러한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 분산되지 않고 한 통로로 함께 모아져 한 요점을 향하여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특별하게 기도는 설교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회개치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간청하려는 내용을 설교하려 한다면, 그 호소를 위해서 마땅히 준비시키는 쪽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중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자의 마음이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간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설교자의 호소를 듣도록 준비시키는 셈입니다. 그렇게 될 때 회중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앞으로 증거 될 설교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회심을 위해 효력을 내게 하는데 합당한 마음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설교자가 그 설교하려는 내용을 가장 적절하게 미리 알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하게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찬송이나, 기도와 설교 사이에 끼어있는 음악곡조가 그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가대석이 강단의 유용성을 대적하는 경우가 흔하고, 성가대의 합창이 설교자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요! 사소한 것들은 생각의 흐름을 다른 데로 돌리고 정서의 과정을 어지럽히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와 관련된 모든 것마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합당하도록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게 조절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께 아뢰는 이 기도가 그 본질과 의도에 따라서 적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도덕적 효과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모든 방면에서 덕을 세우도록 조절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합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기도의 태도에 대해서도 진지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실제의 성질 자체가 허식을 부리거나 너무 정교하게 독창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일을 금기시해야 합니다. 경박하거나 부주의하거나 거만하게 과장된 언사를 쓰는 모든 일을 적잖게 금기시하는 것은 기도의 숙제입니다.


공적인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무엇보다도 반드시 간절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깊은 느낌의 열심, 살아있는 경건, 자신의 구원을 깊이 생각하는 마음의 열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자들의 구원을 생각하는 마음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탄원이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곧 차분하고 세련되어 있으면서도 끈질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상의 임금께 아뢸 때 쓰는 바, 그 간절한 어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곧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왕 앞에 나아가 사면(赦免)을 위해 중재할 때 탄원하면서 보이는 그 어떤 이의 간절한 태도와 같은 분위기가 기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Chapter 7, 목회적 돌봄에서 나타나는 간절한 열심


강단(講壇)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적 돌봄의 요점을 결단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하는 것이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방편이기는 하나 그것만이 절대적인 오직 유일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두 정반대의 극단적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훌륭한 설교와 훌륭한 목회적 돌봄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잘 조화를 이룹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는 이 둘을 함께 결합시킬 것입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영혼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것이고, 가능하다면 어떤 방도를 통해서라도 몇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는 자기직무와 관련하여 목적들을 항상 유념하는 일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의 설교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작성되고 전달됩니다. 그리고 그 설교가 산출하는 효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항상 살피고, 그 결과를 위해서 주목하며 기도합니다. 그가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는 목표를 바라보는 눈은 항상 회중들을 살핍니다. 설교하는 동안에도 누가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진지한 인상을 받고 있는지 살핍니다. 환자 개인마다 가지는 독특한 다양성에 따라서 늘 살펴보는 의사와 같이 자기 설교가 각자에게 어떤 인상을 끼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또한 그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역자는 구원에 대해 간절한 열심을 보이고 염려하며 물어오는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진실로 목표합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 특별한 집회를 열기도 하며, 그들을 참석하도록 독려하고, 그들로 자기들이 크게 환영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또한 영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물어오는 사람에게 30분을 할애하는 데는 그 만큼 영혼을 많이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느 목회자도 간절한 열심 목회를 하는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간절한 열심으로 목회하지 않는 목사는 구원 문제로 고통당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하여도 시간을 내지 않습니다. 이렇게 목회자가 한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수고하는 일은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양의 목회적 돌봄이 간절한 열심목회 활동에 전념하는 모든 목사가 수행할 부분입니다.


목회적 돌봄의 의무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대상은 젊은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들이 아니면 장차 우리의 회중이나 교회들을 구성할 사람들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저는 더 어린 사람들에게 요리문답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들에게 배부하여 교회 전체 회중이 일치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요리문답이어야 합니다. 부모들에게 이런 권고의 말씀이 성경에 주어져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6:7).


목회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 회중에 속한 그 부모들이 자기의 의무를 바르게 감당하도록 촉구하고, 그 일을 잘하는가 감독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전해지는 우리의 설교나 공부반에서 주어지는 교육을 통해서 부모들이 그 의무에 대한 강조가 적다는 사실에 대해서 서글퍼하는 경우가 우리 중에 거의 없습니다. 부모들과 목회자들이 다 함께 빠져든 실수가 있습니다. 곧 신앙 고백자들의 자녀들의 회심을 부모의 교육보다는 목회자의 설교로부터 더 많이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세우신 일의 진정한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가정 내에서의 경건과 가르침이 온당하게 주어졌다면, 그런 참된 질서가 여전히 존재하는 걸 보았을 것입니다. 잠언의 권고의 말씀 속에 진리가 존재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만일 가정 구성원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고 자녀가 어릴 때부터 그 신앙적 의무를 감당하여 분별력 있고, 애정어리고 인내하면서 어린이들을 양육하였다면, 우리의 젊은이들 중 더 많은 숫자가 가정에서 하나님께 회심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마다 자기 교회 안에 있는 부모들이 자기들의 역할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고 신실하게 감당하도록 양육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는 교회 내에 있는 부모들을 인식시켜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자녀들로 그 거룩한 의무를 감당하게 훈련시키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힘쓸 것입니다. 그 진지한 목회자는 기도와 열성을 통해서 부모들이 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그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는 자기 강단 사역이 부모의 의무에 대해서 많을 것을 강조하게 할뿐 아니라, 가정들을 방문하는 것을 자기 교회의 주요한 요점으로 삼고, 그 가정들과 함께 기도하고, 이 거룩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서로 손을 잡도록 해줄 것입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요리문답 교육을 할뿐 아니라 부모들을 위한 이런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시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우리 목회자들 가운데 너무 많은 이들이 이런 주일학교 제도를 자기 의무 밖에 있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목회자는 자기 관할 아래에 있는 회중 가운데서 신앙적 가르침을 위해서 세운 여러 기관들의 머리와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목회자는 모든 양떼들의 선생이요, 감독자요, 그들의 신앙적 지식에 대한 책임이 있는 직책입니다. 주일학교는 바로 그가 감당할 책임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마땅히 목회자의 특별 관심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 교사직의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자격을 갖추게 하거나 그 교사직에 의무를 감당하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목회자의 기능들 중에서 하잘 것 없는 부분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되는 일입니다.


목회자는 어린이들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어린이들 중에도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 구원을 위해서 염려하며 물어오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목회자는 그들을 특별하게 가르치고 보살피고 믿음과 평안과 성결의 길로 인도하려는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구원에 관해서 그런 염려를 물어오지 않는 자들이라도 자주 그들에게 엄숙하고 애정 어린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목회자가 가련한 한 어린 소년의 영혼을 구원할 가망이 전혀 없거나, 불쌍한 어린 소녀의 영혼을 구원해 보았자 어떤 상급도 없다는 식으로 처신하고 있다니요!


주일학교 영혼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모든 목사들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의 규모가 작아 낙담하며 고생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 의무가 더 특별하게 중요합니다. 목회적 수고의 그 어떤 부분도 이 주일학교 교육에 드리는 수고만큼 더 빠르고 더 큰 보상을 받아낼 데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주일학교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신앙 교육 전 체계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회중들이 번성하였습니다.


물론 우리의 관심을 주일학교 교육에만 기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매일의 신앙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살도록 교육시키는 것도 매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큰 과제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역량과 기회를 다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서 그들이 서도록 힘써 훈련시켜야 합니다.


목회직에 있어서 열심을 내야하는 여러 다른 부분들도 있습니다. 병자를 심방하는 일, 특별히 만성적인 질병을 가진 자들을 찾아보고,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 주는 일도 힘써야 합니다. 또한 책망과 경고와 교회적인 권징이라는 어려우나 마땅히 해야 할 그 의무도 있습니다. 헌신된 그리스도의 종은 결단코 자기 교회의 상태를 보고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 질서가 유지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목회자는 선한 목자처럼 자기 양떼를 돌보며,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발설된 하나님의 위협적인 경고를 두렵게 생각하고 그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할 것입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34:2-3).


콜린스(Collins)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참 목자상을 새롭게 출판하였을 때 그 서론으로 캘카터(Calcutta)감독이 이슬링턴(Islington)교구 목사로 있을 때 기고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역자들로서 무엇을 해 왔습니까? 서글프게도 우리 목회 사역직의 그 광대한 중요성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와 인식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양떼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고 설교하는 일과 관련된 그 목회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서글프게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설교나 교회행정이나 가끔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성례를 집행하거나 교구와 연관된 외적인 일들에 우리의 수고를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떼들 개개인에 대한 지도나 교리 학습반을 애정 어리게 유지시키거나, 가가호호를 방문하고 우리 지역에 있는 모든 가정들과 모든 지역 주민들을 방문하는 일, 또 그 사람들과 친숙해지는 일, 마음의 궁핍과 상태, 공적 예배를 참석하는 그들의 습관, 주일을 성수하는 문제, 자녀들과 그 가정에서 일하는 종들을 교육하는 일, 각 가정의 경건회 등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지 살피는 일에 있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우리는 간절한 열심으로 양떼를 각자 각자를 돌아보았습니까? 우리의 평안이나 즐거움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희생시켜서까지 악한 세상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양떼들을 돌보아 영원토록 구원받게하기 위하여 애썼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는 진실로 이 점에 대해서 참으로 큰 허물이 있습니다.”


기독교 목회사역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불멸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Chapter 8, 목회 사역 속에서 나타난 간절한 열심의 본보기들


우리는 본보기를 통하여 감동도 받고 또 우리의 나아갈 방향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가르치기도 하고, 또 행동하도록 강권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탁월한 본보기의 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탁월한 것의 본이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그분은 친히 설교자와 교사로서 설교자와 교사의 신적 원형(元型, archetype)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바로 그 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설교의 내용만이 아니라 설교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그 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 분의 생기와 부드러움과 성실함과 엄숙함에 있어서 부단히 그 분을 친밀하고 부단하게 따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아서 그 분이 행한 대로 할 엄숙한 당위 아래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의 모든 성품 중에서 간절한 열심을 택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쉬지 않고 항상 활동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복음서의 어느 장면이든지 찾아가 보십시오. 항상 일하시고 설교하시고 기도하시고 우시는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분은 제자들이 동네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을 그 짬에도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사랑에 충일한 영혼의 호흡이었습니다. 그분의 강론은 자비가 흘러 넘쳤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가기를 주저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혼인잔치, 명절들, 심지어 장례식에도 가셨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눈과 마음과 혀는 오직 한 가지의 목적에 매여 있었습니다. 곧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이여, 바로 여기에 그대들을 위한 본보기가 있도다. 간절한 열심의 본을 따라 갈지어다.


이제는 그분의 종들을 숙고하되, 먼저 사도 바울을 관찰하여 봅시다. 사도 바울의 행실에서처럼 신적인 주님의 간절한 열심에 더 가까이 접근해 있는 이를 어디서 만납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회심한 순간 이후 오직 한 가지의 목적만을 위하여 존재하였습니다. 곧 영혼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오직 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를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영혼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논쟁할 때든지, 아니면 사슬에 묶이어 베스도의 법정에서 아그립바 왕이 보는 자리에서 기독교의 대의를 진술할 때든지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설립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어느 곳에서나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역자였습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말 중의 한 표현은 그의 설교의 정신과 골자를 간명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0:31).


, 그 눈물은 얼마나 우리의 우둔함을 질책하며 얼마나 우리의 부족함을 입증해 줍니까!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섬긴 이 빛나는 종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정말 기이함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의 회심과 그의 삶의 내력은 한 인간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응축될 수 있는지, 또한 다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계발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한 사람이 얼마나 큰 고난도 감내해 낼 수 있는지, 또 어떠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또 그로 인하여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려고 그의 회심과 삶의 내력을 성경에 기록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한 사람을 도구로 쓰시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사랑의 목적들을 이루어 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을 성취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의 몇 단어로 구성된 짧은 한 문장은 그의 전체의 삶과 그의 삶의 모든 수고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1:21).


그 짧은 말 속에 얼마나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으며, 얼마나 놀랍게 영혼이 진전될 수 있는지요. 또 그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이 얼마나 포괄적인지도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이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일을 떠나서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 한 목적을 향하여 자라왔고, 그것이 나를 삼킨다.”


이것이 바로 간절한 열심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심겨져 계발되게 한 당연한 원리였다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그런 분이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그러한 분이 되지 않아야 할까요? 그가 그처럼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하였는데, 우리는 어째서 하지 않아야 합니까? 그를 주장한 동기가 그것 단 하나였다면 그것이 우리를 강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여, 여러분이 이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마땅히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어떤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알 목적을 가지고 살펴보십시오. 이 복된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수고하였는지를 비추어 본다면, 그렇게 차가운 지성이나 화려한 웅변술이나 섬세한 형이상학적 설교들로 만족해야겠습니까? 여러분이 일주일에 두 번 설교를 하고, 그 수고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이 만족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여러분의 부르심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여러분이 면밀히 연구하고 열심히 책을 읽고 좋은 글을 쓰는 저자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이 하나님께 회심하지 않고 세상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렵게 수고하지만 혹독한 시련을 받고 얼마 되지 않은 봉급을 받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회중들과 변덕이 심한 친구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까? 바울의 이야기를 청종하고 잠잠하십시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3-29).


인간의 작품이나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대목이 발견됩니까? 그 대목을 읽으면서 누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고 고난 받은 것이 나로 하여금 이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선 그리스도의 사역자라는 칭호를 얻게 할 수 있는가?’라고 감히 물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본보기는 여러분에게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너무 고상한 본이 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핍박의 귀신의 공격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돌에 얻어맞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설교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무려 백 이십 권이나 되는 책을 써 출판하였습니다. 그런 분량의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기계적으로 수고하였어도 삶 전체를 들여야 할 일임을 드러냅니다. 그 점에 대해서 바로우 박사는 말합니다. “그의 실천적 저작들은 한 번도 수정된 적이 없었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도 논리가 모자라다고 묵살 당한 적이 없다.”


Chapter 9, 간절한 열심의 동기들


. 진리


기독교 사역자에게는 그 다루는 주제나 주어진 목적으로 볼 때 간절한 열심이 요청됩니다. ‘진리는 우주 내에서 거룩다음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 목회 사역의 테마입니다. 일반 학문의 어떤 분야라도 좋으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또 그것이 아무리 존귀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더라도, 또 그 학문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하는 사람이 그 학문상의 진리를 아무리 강하게 주장한다하여도,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최고 우월성의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전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성경을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철학체계든지 다 불러와 그 성경에 엎드려 충성하게 하셨습니다. , 사역자들로서 우리의 주제가 바로 그 진리, 그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연구를 얼마나 간절한 열심을 가지고 추구하는지 살펴봅시다. 그들은 열심을 다해 땅을 연구하고, 망원경을 통해 열심히 천체를 응시하느라 밤을 밝힙니다. 그들은 시험과 분석을 하느라고 오랜 시간을 참고 연구합니다. 그들은 지칠 때까지 수고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낙담하면서도 계속 참아냅니다. 그들이 이처럼 자연의 비밀을 있는 힘을 다해 들여다보고 연구한 뒤에 그 학문 진리의 작은 파편이라도 발견했다 하면 얼마나 화들짝 기뻐들 합니까!


복음을 위해서 섬기는 사역자들이여,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이들이 그런 모습인데, 영감된 계시 진리의 책인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성경이 말하는 엄청난 실상에 대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빈둥거리거나 하찮은 것을 대하듯 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사람의 신체를 해부하여 몸의 유기적 화학 작용의 법칙을 알아내어 그 몸의 각 부분을 설명하는 이들에게서 그 간절한 열심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불멸의 영혼과 관련된 진리를 다루는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그런 이들에게서 간절한 열심의 표본을 얻어야 하다니요!


아무리 해도 물리적 지구의 수준 이상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대상이나, 지구의 존재보다 결코 더 영구하지 못할 대상들을 연구하여 발견한 교훈들을 가진 사람들 보다 우리가 더 간절한 열심을 훨씬 더 강렬하게 보여야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과 전체 도덕적 우주세계와 연관 있고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진리와 상관하는 우리보다 그 간절한 열심을 훨씬 더 강하게 보이다니요.


하나님께서 그처럼 장엄하고 외경스럽고 숭고한 이 진리를 무슨 목적으로 계시하셨으며, 또 우리로 설교하게 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 문제는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 갈증을 채우려는 지성적 만족을 채우는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불멸의 영혼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여 영광스럽고 불멸하는 거처에 인도하기 위해서 이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그 진리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를 공포하면서 간절한 열심없이 다른 방식으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차가운 손이나 활기 없이 조는 듯 멍한 생각으로 그러한 주제를 접근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지성적 존재들을 깨우고 활력 넘치게 견지하는 진리에 대해서 그처럼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리고 그저 관심없이 냉정한 방식으로 그러한 주제들을 다룰 수 있고, 그러한 목적을 차가운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미지근한 상태를 버리지 못하는 죄악을 우주 내에서 가장 놀랍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우리는 고대든 현대든 웅변의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던 연설문을 읽습니다. 그 능한 웅변이 나올 때까지 그들의 불타는 영혼과 함께 존재하였던 그 간절함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우리는 감동합니다. (자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심했던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노예제도에 목소리를 높였던 영국의 윌버포스(Willberforce))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절한 열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역 아래서 영혼들이 살아나 하늘의 영구한 기쁨과 명예를 얻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목회 사역의 강단 주위에 있던 영혼들이 무저갱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수를 채우거나, 멸망하는 자들의 허다한 무리의 수를 더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신앙 고백에 걸맞고 우리의 확신에 어울리는 그 간절한 열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 진리를 믿지 않는 채로 설교한다면 우리가 크게 속이는 자요 강단은 무대의 연기나 거룩한 척 하면서 위선을 떠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저주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처럼 조심성 없고 그처럼 죄악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그런 것들을 설명할 때 냉담한 자세를 보일 수 있어야겠습니까? 일반적 철학의 분야를 다루는 공적인 강사가 그런 냉담한 자세로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사람과 같은 자세를 견지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이상(理想)이나 우리의 신앙심이나 우리의 일관성은 어디로 갔습니까?


. 인간의 심령 상태


진리와 목적에 연관시켜 볼 때 인간의 심령 상태는 바로 그 간절한 열심을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상태로 오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설득의 힘으로 그 마음을 공략해야 합니다. 즉 사도가 보인 그 간절한 탄원과 끈질긴 간청을 우리도 필연적으로 반드시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자와 싸우는 미친 짓에 빠져있는 패역한 세상을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는 악을 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피부에 와 닿고 눈에 보이는 이생에 속한 것에 사로잡혀 그 영향과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활력 넘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이생의 것들의 부당한 영향력들을 계속 저항하도록 그들을 부추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목적과 수고는 장차 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그 현재 마음 상태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 세상의 겉치레에 매혹당하고 있으며, 그러한 현혹 속에서 계속 머물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내내 사람들은 사업을 해 나가는 일에 사로잡혀 있고, 이생의 염려나 위안이나 시련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처럼 헐떡거리며 자기들의 땅에 속한 소욕의 여러 대상들을 소유하려고 부산하고 더 누릴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을 엄숙한 신앙의 문제로 돌리려 하는 우리를 마치 침입자처럼 취급하고 건방진 훼방꾼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력을 쏟아야 하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진리를 받기 싫어하는 마음의 정서뿐 아니라 그 진리를 대적하려는 마음의 상태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자신들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성적 성향이 얼마나 죄악적인지를 지적하며 맹렬히 공격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대단한 정도로 성공하였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에게는 불완전함과 연약이 조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 속에 얼마나 철저한 무가치함과 부패가 자리 잡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만감을 몰아내고 자신이 정죄받고 있는 혐오스러운 위치를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겸손하지 못한 채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의뢰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기는 그 도덕법이 사람을 얼마나 저주에 들어가게 하는지 깨닫게 해야 합니다. 죄를 뉘우치며 두려워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에 비추어 자기의 죄가 용서 받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자기만족이나 교만의 작용의 가장 작은 잔재도 용납하지 않는 차원에서 구원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한 메시지는 자주 싫증을 유발하고 대적하는 인간의 강퍅한 마음 상태를 불러 일으키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자기 사랑의 모든 악한 심성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복음 안에서 제시된 구원은 타락한 사람의 교만뿐 아니라 정욕들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메시지는 오른 손처럼 사랑스러운 죄악들을 끊을 것을 요구하며 우리의 전체의 영혼을 유혹하여 사로잡았던 대상들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자라나면서 익혀왔고 힘이 있으면 더 강화되는 그 습관들을 부수어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내적인 갈등뿐 아니라 밖의 대적들을 향해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중들에게 때때로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오신 것은 화평을 주려 함이 아니라 칼을 주려 함이요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대적하려 함이라(10:34-35)고 하신 말씀을 실증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한 어떤 이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잔인한 모독과 비난과 위협과 포악을 당할 것이니 그런 경우 믿음을 지키도록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진실로 오늘날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에도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기독교 목회 사역의 여러 난점(難點)들을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받은 첫 번째 인상들이 구름이나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지 않게 지키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몰아대어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멈추어 서지 말게 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겁이 많은 자들은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며, 마음의 속임수를 간파하게 하며, 자기를 성가시게 하며 넘어지게 하는 죄들을 끊도록 초심자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결심을 고취시켜주고, 영혼을 자극하여 계속 성화(聖化)의 진보를 추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본성의 유행병과 같은 만성적 병폐를 대처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를 도와서 원수된 마귀의 간계를 발로 밟아 비틀어버리게 해야 하며, 그 신자의 여러 모든 시련과 유혹과 난제들 중에서도 계속 주의 일을 힘쓰고 요동치 않고 주의 일에 수고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 거하는 사람들을 죄와 사탄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께 되돌릴 의향과 소원을 가지고 화목의 사역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간절한 열심이야말로 신적 동작자’(Divine Agent) 되시는 성령께서 채용하시는 바로 그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회심케 하시려는데 미지근하고 게으른 목회사역에 결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하고 끈질기게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 영혼들의 회심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열심이 없이는 성령의 열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의 간절한 열심은 헛수고가 됩니다.


. 시대의 풍조


이 시대의 특징들은 정말 유별납니다. 사람들은 부()를 이룩하는 일에 온 영혼을 다 쏟고 있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합리주의 철학의 기조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싹이 나와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백성들로 이러한 기괴하고 이기주의적인 정신에 맞서서 인내하도록 일깨워주고, 또 그 이기주의적인 정신을 제압하도록 하려면 얼마나 더욱 많은 열심을 쏟아 부어야 마땅하다 보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로 잠시적인 세상의 것들의 찬탈하는 세력을 압도하려면 목회자 편에서 강력한 헌신 이외에 무엇이 충분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들을 다루는 법과, 장차 올 내세의 능력들을 행사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소용돌이에서 현세의 사람들을 신속하게 구출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신앙 고백자들이 현대의 상거래의 계략과 술책, 사실상 부정직에 끌려 다니는 위험에 처해 있는지요.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깨워 이러한 더럽고 이기적인 정신을 대항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정신을 제압하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능력있고 힘 있는 목회 사역이 필요하겠습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것을 아는 사람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자신의 지성이 영원성의 외경스러운 영광과 그 가공할 두려움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의 설교를 듣는 자들을 맘몬의 멸망시키는 미혹에서 구출해 내기에 합당한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실리를 추구하는 이 과격한 세대에 돈을 사랑하고 애착하는 정신을 가진 회중들을 훈육하기 위해서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나 두리틀(Doolittle)이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나 존 하웨(John Howe)나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같은 이들의 청천벽력 같은 호통이 우리에게 얼마나 요청되는지요.


. 타 종교 집단의 열심


이제 우리는 다른 종교 집단이 보여주는 그 간절한 열심을 숙고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시대가 끝이 나고 종말을 고하였다는 확신으로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가며 어느 곳에서나 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우리 대적들로부터 본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눈 감아 버리거나 모른 척 하면 그 또한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를 일깨워 활동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크게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영국 국교회도 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을 일으키는 바람이 마른 뼈 골짜기에 불어 닥치고 생명을 가진 군대뿐 아니라 생명을 주는 군대로 일어났습니다. 지금 현재 영국 국교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활력과 간절한 열심이 넘쳐납니다. 신학적 견해는 여러 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두 활동적이고 설교에 열심을 내고 있으며 교리를 학습하고 있으며, 병자를 심방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지휘 감독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교회에 속한 성직자들 중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교리나 정신이나 헌신에 있어서 진정한 사도의 본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경건과 열심에 있어서 우리가 본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고도 충성되게 자기들 교회를 섬겼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교회의 대의를 촉진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이들을 보고 나무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에 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열심과 헌신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애쓰는 모습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저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한 성직자는 다른 여러 수고를 제외하고도 매일 4-5시간을 가가호호 방문하고, 병든 자를 찾아보고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곤고한 자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 우리 눈앞에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도 간절한 열심 목회 사역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터전을 유지할 뿐 아니라 어떤 진보를 위해서 간절한 목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잉글랜드의 비국교도들, 특히 국교회에서 탈퇴한 목사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간절한 열심을 내라.’ 무엇보다 먼저, 가장 주요하게 복음의 교리들을 고수하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조와 모든 참된 신앙이 존재했던 모든 시대나 나라들에서 하나님께서 채용하셨던 위대한 원리들을 고수하라고 강조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원리들을 통해서 죽은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부패한 세상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학식을 겸비하고 특별히 건전한 복음적 정서를 가진 목회 사역직을 소유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며 힘써 그런 거룩한 열정을 가지십시오. 강단 사역에 관하여 그것이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강론은 단순하면서도’, ‘열심은 간절하고’, ‘경건의 불이 타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정도의 수고를 견지하십시오. 영국 국교회 성직자 중에서 가장 모본이 될 만한 자들과 경쟁할 만한 그런 목회 사역이 나타나기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들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 중에 간절한 열심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열심의 높은 파고 속에서 삼켜지고 싶지 않거든 그에 상응하는 강도로 그들의 열심의 파고(波高)를 대처해야 합니다. 국교회가 보여주는 열심을 보고도 우리 측에서 자극을 받아 간절한 열심을 향하여 분발하지 못하면 우리를 깨우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각 목회 사역자들마다 자신의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영역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여 힘을 씁시다.


. 풍성한 영적 보상


열 달란트를 갖지 못했으나 한 달란트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둘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한 달란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 부지런히 장사하면 자기를 종으로 쓴 그 주인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자신을 위해서도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만하여 자기들이 가진 달란트의 액수를 과대평가하고, 또 다른 이들은 너무 겸손하거나 게을러 자기들이 가진 달란트를 너무 낮게 계산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진 자원을 다 소진시키기는 커녕 열어보지도 못합니다. 제가 한 목사를 알고 있는데 그는 무엇이든지 하기를 무서워하며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활기를 잃어버렸고, 모든 일에 대하여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옮기셨고, 그런 경로를 통해서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다시 소생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나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알고 있는 가장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 중 하나가 된 셈입니다.


그의 모든 에너지가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죽었던 것이 되살아 난 것입니다. 다른 많은 목사들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활동의 원리들(씨앗들)이 그들 속에 있어 좋은 처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또 그들의 의지가 되살아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씨앗들의 생명의 활력과 움직임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면 게으름을 핑계로, 또는 두려움으로 자기는 못한다고 겸비함을 내세워 뒤로 물러가거나 양심이 둔화된 상태에 있었던 자리를 떨쳐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그가 열심 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지만 가지면 모든 목사마다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목사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일에 대단한 위기가 닥쳤다 하면 분발하여 열심을 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났거나, 자기 건강이나 생명이 위험에 처하여 있다거나, 자기 아내나 자녀가 위험스러운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의 강렬한 정서와 맹렬한 행동이 얼마나 크게 일어날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불멸의 영혼들의 진정한 영광을 위하여 자기 양심을 계속 부추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그 마음이 받아야 합니다. 그 거룩함을 입은 열정의 세력과 끈질김으로 말미암아 떨쳐 일어나기까지 말입니다.


저는 목회자의 책무에 대한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양심에 호소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가진 달란트의 분량으로서는 자기보다 더 많은 은사와 좋은 조건을 선물로 받은 형제들이 도달한 그 성공의 정도에까지 결단코 이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가진 분량으로도 그가 들인 수고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느라 시간을 보내거나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앉아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한 만큼 하지 못한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떨쳐 일어나십시오. 복된 의식을 가지시고 할 수 있는 것을 행함으로 얻는 상급을 받으십시오. 진정한 참된 열심의 부지런함으로 떨쳐 일어나 복된 결과들과 영원한 귀추를 여러분의 소유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26:13).


그러나 길에는 사자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상상일 뿐입니다. 자신이 게을러 길에 사자를 세워놓은 것입니다. 수고하십시오.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애를 써보십시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느니 실패하는 편이 낫습니다. 새로운 경건함의 헌신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은 우리 중 어느 사역자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막대한 중요성과 엄청난 결과들을 합당하게 제대로 온전하게 평가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중요성과 귀추들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믿습니까? 한 사람의 영혼이 회개하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까? 이것이 그저 순전한 진리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단순한 수사학적인 말에 불과합니까? 아니지요. 정말 그것이 진실이라면, 또 우리가 그것이 진리임을 안다면 그 일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가진 것입니까! 한 영혼을 성소(聖所)의 저울에 달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가치를 매기십시오. 그 영혼의 가치를 의식하십시오.


! 놀라운 구원이여! ‘구원이라는 말은 정말 놀라운 말입니다. 찰스 1세 왕정 때 왕실 출납 장관이었던 대주교 윌리암스(Archbishop Williams)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70년 동안 제 자리에 있었던 그 어느 사람보다도 교회와 국가로부터 존귀와 신임을 받는 여러 요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제 설교를 통해서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섰다는 것을 확신하기만 하면 제게 부여되었던 그 모든 존귀와 직임에서보다도 더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대주교로부터 나온 그 고백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자기가 한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느데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 고백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줍니다. 또 그 고백은 이 거룩한 역사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하는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놀라운 격려가 됩니까!


불멸의 영혼을 회심께 하는데 쓰임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대단한 웅변을 통해서 대중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그에 비하여 얼마나 헛되고 무가치합니까! 우리가 도구가 되어 한 구속 받은 죄인이 사망에서 구원 받았다는 증거를 들으면, 거기에 비추어 다른 이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꿀 같은 칭찬이나 그들이 내 놓는 황금 같은 견해들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천칭(天秤) 저울에 앉아 있는 작은 먼지에 불과합니다. ! 내가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했던 그 영혼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받고 그 놀라운 재능과 은사로 말미암아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맥컬(Dr. McAll)박사는 강단 사역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효과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대해 민감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핀 목사에게 거듭 말하였습니다. “, 내가 영혼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내 능력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겠다.” “내가 진정 원하던 것은 영혼들의 회심과 영적인 성장이다.” “저는 사람들의 갈채를 원하지 않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합니다.”


, 모두 이 점을 주목합시다. 정말 대단한 은사를 부여받은 지성들의 평가 속에는 불멸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것이 없음을 배웁시다. 그 일보다 목회의 수고하면서 추구할 더 큰 풍성한 보상이 없음을 우리는 배우도록 합시다.


. 성공의 전망


우리가 주목할 다음 사실은 간절한 열심이 그 목적을 이룸에 있어서 통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혼을 감화시키는 신적 감화의 필요성을 진실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되 방편을 통해서 역사하심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목적을 성취하는데 가장 부합한 방편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위대한 변화의 열매는 진리를 제시하여 분별해 보게 하고, 마음에 신적 은혜의 역사가 함께 병행할 때 나타납니다. 진리를 진실로 숙고하는 경우들에서만 그런 복된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은 명백합니다. 그 점을 신중하게 유념해야 합니다.


이 점을 주목하십시오. 깊이 주목하는 것, 어느 정도까지 마음의 생각을 거기에 쏟는 일이야말로 회심의 역사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진리를 주목하고 그 밖에 다른 문제들에서 마음을 떼어내어 자기가 증거하는 진리에 유념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주권적인 방식으로 당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시어 마음의 악한 성향을 그렇게 제시된 진리로 향하도록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설교자들 속에서 회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능력을 감지하는데, 우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선을 이룰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회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중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회중들에게 관심을 촉발시켜 진리를 숙고하도록 인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더 좋은 유익을 더 끼치기 십상입니다.


간절한 열심의 중요성은 너무 과장되게 강조하지 않았나하는 의심이 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성공적으로 설교하는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어떠한 이들이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리처드 백스터, 존 번연, 두리틀, 플라벨, 헤이우드, 하웨 같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양심을 향하여 장렬하면서도 신랄하고 힘있게 호소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문을 읽어보면, 모든 설교가 목표해야 하는 바 죄인들의 회심이라는 높은 목표를 성취하였음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휫필드나 웨슬리 같은 사람은 다른 어떤 일보다는 거의 불멸의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살았고 수고를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강력한 전도 열정을 불어 넣어 위대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매진하였습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그 설교들은 간절한 열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서 열기를 뿜었던 그들의 소욕,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의 설교 속에 나타난 적용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목적의 단순성과 목표의 통일성과 집중력이 얼마나 놀랍게 존재하였는지요. 그들의 고상한 전 생애를 통해서 그 목표의식을 방해하는 다른 것이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던지요!


그러나 아직도 생존해 있으면서 평범한 수준을 뛰어 넘어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세요. 우리 당대에도 기독교 목회 사역의 목적과 복음적 설교의 목표를 가장 강력하게 성취한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간절한 열심말고 다른 방편을 통해서 그런 성공이 이루어졌는지 탐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요점들은 대중들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자들입니까? 높은 학자적 이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심오한 철학이나 우아한 문장 작성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힘이 있고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요, 자신들이 주님께 쓸모 있기 위해서 자신들을 다 내어 놓은 사람들이며, 자기 이웃들과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이며, 따뜻한 마음과 정서와 인내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세속적인 일들을 가리키며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의 작정을 하기에 충분한 결심의 의지력을 가진 사람이 보통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결심을 견지할 어느 정도의 달란트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부인하는 효율적이고 엄격한 체계를 구상하여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 사람이 보통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여러 사람들의 경우를 주목해보면 그 요점의 정당성을 지지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는 더 큰 확실성을 가지고 주장될 수 있습니다. 목회 사역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강렬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강렬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깊은 경건을 잘 견지하며 자기가 받은 달란트와 많은 일들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의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쓸모 있는 일꾼이 될 마음의 결심을 굳힌 사람, -그런 이가 아니면 목회의 목적에 미치지 못할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또 그러한 경우를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간절한 열심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행동과 상태를 유지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본을 보고 따를 사람들이 분명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논리가 악한 범주에서도 해당이 된다면 선한 범주에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날 것을 얼마나 더 기대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가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보면 그 성공을 얻기 위한 올바른 방편을 사용하는 일에 게을렀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지성과 분별력과 간절한 노력들을 하게 해주십사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 방편 사용을 게을리했음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복음적인 강단에는 분명히 그 속에 내재하는 힘이 있기 마련입니다. 도덕과 종교적 인상과 방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합니다. 그런데 휫필드나 다른 소수의 몇 사람들 말고는 그것을 연구하고 계발하고 적용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보다 더 집중적인 경건이나 더 강한 믿음, 인간 마음을 아는 더 나은 지식, 인상 깊은 웅변술을 갖고자 하는 더 강렬한 열심, 죄인들의 회심을 보고자 하는 격렬한 갈망을 더 가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응당 그래야 했겠죠. 이미 주어진 그 권능을 소홀히 한 국면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Chapter 10, 간절한 열심 목회를 위한 방편들


. 참된 목회의 보호자


교회가 참된 목회를 보호하는 보호자라는 것과, 아울러 교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중요한 의무를 잘 감당하는지 자신을 늘 살펴야 한다는 것, -이 요점이 정말 절대적인 우선에 있음을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그 진리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절박한 일입니다. 교회는 현재 자기 교회가 바로 서있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는 세대들이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오염되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 순결하게 전수(傳受)받도록 가능한 모든 세심한 주의와 관심과 운용력(運用力)을 총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본질적이고 영원한 혜택을 부여하는 우리의 참 종교인 기독교의 능력을 그대로 이어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가 순전히 영적인 몸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적이고 효력 있는 목회를 끌어내고 확보하고 영구화시키기에 가장 직접적인 성향을 가지고 가장 활발하게 힘을 가진 교회정치(敎會政治)체제가 어떠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야 말로 결코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할 중차대한 질문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효력 있는 공급선이 되지 못하는 교회정치 체계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기원(起源)한 것일 수 없습니다. 이런 목표에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체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교회가 아니고는 영적인 목회를 공급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교회들에서 마저 훈련이 느슨해지고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도록 허용하면, 그 견지해야 할 정통 원리나 그 교회 지체들의 생명력 있는 경건이 손상되기 마련입니다. 만일 동시에 훈련을 소홀하게 여긴다면, 그 생명 있는 경건이 아주 소실되기도 하고, 이단적인 사람들이 들어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전파하는 설교자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교회들이 복음적인 목회를 보수하고 지키는 그 높고 거룩한 역할을 위해 부단히 깨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있는 경건을 유지시키고, 건전한 훈련을 계속 견지해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자기들의 높은 영광스러운 사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항상 그 점을 교회들은 유념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망각하고, 신앙이 있다고 하나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 그러한 교제를 더럽히게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담이 무너지고 울타리가 훼파되어 이리들이 들어와 양떼를 해치게될 것입니다. 교회의 이러한 신령한 조건을 견지하십시오. 그러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교회가 존재하여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될 것이고, 그것이 이 세대를 비춰주고 오는 세대들이 안전하게 하늘의 복락에 이르게 하는 오직 유일한 길을 찾아 갈 것입니다.


. 학식의 가치와 한계


현 시대는 지식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지식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자질들을 평가절하하고 있으며, 젊은 사람들은 학위 취득이 목표가 되어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오직 지식을 얻는 일에만 골몰하는 속임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학생들이 그런 학위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하게 막는 것도 야만적이고 헛된 방책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와, 우리 회중들의 사고와 우리 목사들의 사고 속에 다음과 같은 확신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 ‘간절한 열심은 다른 모든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간절한 열심이 없으면 교육이 분담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아마 우리의 회중들은 이 주제에 관하여 약간의 가르침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재능을 우상화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숭배하는 사상이 교회에 은근히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들이 부패하였습니다. 그렇게 드높여지는 것이 참된 성결이나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재적 재능과 지식이 그렇게 드높여지고 있습니다. 지성적 힘을 그렇게 높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시골의 초신자마저도 지성적인 설교자들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거룩하더라도 재능이 약하면 시골 지역에서마저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탁월성보다 재능을 더 크게 높여 말하는 오늘날의 분위기는 우상숭배의 또 다른 형태이며, 결단코 그런 악을 나무나 돌을 숭배하는 것보다는 덜 죄가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 사역에서 재능을 어느 정도 존중하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 재능을 목표로 말하는 성향이 인간 본성과 불가분해적이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해력을 부여하신 의도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세련된 지성은 우아한 모양의 작품이나 아름다움만큼 찬탄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달란트와 같은 은사에 너무 매혹된 나머지 메시지 자체 보다 채용한 은사를 더 높인다 합시다. 그리고 설교자의 교리가 아무리 건전하고 그 설교문들이 아무리 명료하고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고, 그의 연설이 아무리 간절하다 할지라도, 그 강론이 재능의 빛으로 번쩍이거나 꽃과 같은 아름다운 수사(修辭)의 화려함으로 빛나지 않는 한 참고 인내하며 듣는 자가 없다고 합시다. 인간적 웅변이라는 꿀을 발라 달게 하지 않으면 진리 자체 만으로는 맛이 나지 않거나, 심지어 달콤하게 가미하면 오류(誤謬)라도 그 감미로운 맛 때문에 삼킨다 합시다. 더 나아가 설교에 싫증을 내는 이유가 그 설교 할 때 번쩍거림으로 누군가의 상상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식이 된다 합시다. 아니면 설교하는 내용이 부드럽고 조화롭게 그 귀를 즐겁게 해주지 못해서 듣지 않는다 합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분명 우리 회중들의 관심을 더 높고 선한 것에 기울이도록 촉구할 때입니다.


시대의 그 두드러진 특성을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설교자들과 그 설교들에 대한 공중(公衆)의 취향이 어느 정도 부패의 방향으로 많이 기울어지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단에 선 목회자들이 웅변가의 연단이나 말 잘하는 설교투를 부러워할 만한 이유가 없지 아나 있습니다. 부단하게 말로 무엇을 해내려고 하는 오늘 현대의 실상이 설교 투의 경직성과 형식을 부수어버리는 무슨 일을 하였다 합시다. 또 설교자 편에서 보다 쉽고 유창하고 힘 있게 연설하는 방식을 들여오고, 회중 편에서 보다 구미에 당기게 보다 쾌활한 가르치는 방식을 들여온 어떤 일을 해 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정반대로 설교자로 하여금 너무 웅변적인 수사술(修辭術)을 쓰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까다로운 입맛을 갖게 하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리하여 엄숙성과 영성 모두에 있어서 선한 것을 파괴하는 그릇된 효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정도의 간절한 열심이 앞으로도 여전히 견지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사람을 회심하게 하는 간절한 소원보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열망에서 나온 열심, 사람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열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식의 목회 사역을 희망한다면 정말 헛된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우리 회중들은 그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 줄로 착각하는 데로 인도되고, 회중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주어지기를 간구하는 데까지 나가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같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요가 공급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러한 경우를 상정해 보세요. 교회들이 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구원의 깊은 갈망을 가지고 영성을 강력하게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회중들이 그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들을 도울 목회자를 모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 목회자 대학의 교수들이나 위원회에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학식 뿐 아니라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주세요.”

그러면 그들의 마음의 생각이 기독교가 목표하는 가장 본질적인 성격에 보다 더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갈수록 그런 요구에 부응하려고 더 갈망하며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곤궁한 회중들로 하여금 다음의 요점을 알게 해보세요.


기독교 목회란 단순히 예술의 대가가 하는 일도 아니고 단순한 웅변적인 연사가 감당하는 일도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선한 신학자가 감당할 일도 아니라, 오히려 그 영혼들을 주시하며 하나님의 양떼들을 먹이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우리의 젊은 목회자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목회 사역의 목적에 더 전념하게 될 것이고, 그 목회 사역의 여러 기능들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들이 무엇인가에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런 주제에 대한 바른 교훈을 가지고 그 기준을 바르게 적용해 보십시오. 또한 교회를 양육하여 확신을 가지게 하십시오. 곧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만 쓸모가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확신한 사람들은 자기의 확신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 나아갈 것입니다.


. ‘간절한 열심을 가진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자를 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목회자들이 부름을 받고 자격을 갖추고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 것은 주 성령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3:15).


사도가 말한 것도 역시 같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4:11-1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하게 명하신 것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해당 되는 교훈의 말씀으로 주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십사고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교회가 높은 영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 기도 제목이야말로 여러 드리는 기도 제목들 가운데 반드시 들어갔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시대,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화해의 목회 사역을 위해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요구되는지 충분하게 생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적을 행할 만큼의 영감과 권능을 가진 사도들의 특별한 측면을 제외하고는 사도의 모델을 모든 방면에서 정확하게 따를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감당했던 일과 같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직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충만하고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그 일을 감당할 목회자를 정말 구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이와 같은 시대에서 어떤 일과 맞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박해하는 영이나, 툭하면 피를 흘리게 하는 법적 처리나, 원형 경기장의 격투기나 도끼나, 화형대에 오르는 것과 같은 일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국면들에서는 더 당해내기 힘든 장애들과 싸워야 합니다. 부와 지식과 풍조의 교활하기 짝이 없는 올가미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무역거래와 정치와 세속적인 야심이라는 그야말로 마음을 빼앗는 세력이 우리를 막고 서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설교자, 목회자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낮은 수준의 신앙심을 지키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거나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다고 한다면, 평범한 특성을 가진 목사들이면 충분하겠죠. 그러나 문제는 생명 있는 경건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수들이 교회를 황폐화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상적 정신과 싸우려면 목회자 개인의 인격적 본이라는 잠재력과 강단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각성 받은 복음적인 열심을 계속 견지해야 할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거기에다가 거룩성과 영성을 가미하여 그 복음적 열심이 활발하게 작용하게 할 뿐만 아니라 효력도 가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동일한 믿음을 공략하려고 덤비는 모든 형태의 오류와도 맞싸워야 합니다.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지성의 힘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그의 권능 안에서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사명부여로 구원의 말씀을 설교하되,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오신 성령님을 힘입어 설교하던 자들과 동일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영적 전투장에 그러한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리 많지 않다면 어째서 그러하죠? 그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스스로 자책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기대할만하거나 바람직할 정도로 우세한 세력을 얻고 있습니까? 회심의 역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마땅하게 바랄 정도로 흑암의 권세를 새롭게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까? 누가 감히 이런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하는 모험을 감행하겠습니까?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지금 현재의 상태가 계속 존속하는 것을 그냥 좋게 여길 정도로 미약한 맥박을 보이는 사람의 심장 속에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박동하고 있습니까?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이며, 구속적인 긍휼의 역사를 가속시킬 방도가 없는 것이며, 영적 풍성의 원리들을 우리의 메마른 세상의 도덕적 광야 전체에 더 신속하고 더 광범하게 부을 방도가 없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여전히 한 길이 아직 열려져 있습니다. 그 길은 시온이 스스로 깨어 자신을 분발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으며 우리에게 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더 보내주소.”라고 간청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른 특성을 가진 목사들을 보내어달라고 기도하기를 잊었습니다. 우리의 개인 기도나 가정 기도나 공적으로 모여서 헌신하는 일에 있어서 그 기도 제목이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간혹 지나가는 투로 그 주제를 건드리기는 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뉴욕의 스키너 박사(Dr. Skinner)성경의 종교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기를 꺼려할 것인가? 어째서 개혁을 당장에 시작하지 않아야하며, 어떤 죽을 인생의 운명이나 어떤 천사의 방언보다도 기도회 장소가 더 매력적이게 보이지 않아야겠는가? 어째서 참된 그리스도인 각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삶을 바꾸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후부터 보다 충성되고 열심 있고 부지런한 목회자를 우리에게 주십사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씨름하는 간구를 드려야하지 않을까?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와 다니엘과 바울이 기도에 힘썼으며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기도하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째서 우리는 상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복 되신 주님께서 친히 기도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셨는가? 그러한 기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적에 얼마나 놀라운 분량의 은택의 능력을 불러왔는가! 은혜의 기이한 일들이 우리 교회에서 목격되고, 그래서 거룩한 목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 많아지고, 대단한 추진력이 선교의 대의(大義)에 주어지고, 교회의 모든 전망에 밝은 빛이 부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교회와 사역자들의 선한 열심


교회의 상태가 소성(蘇醒)되면 우리가 앞선 내용들 속에서 묘사해온 것과 같은 목회가 산출될 것입니다. 일의 자연스런 순리에 따라, 교회가 소성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이전에 목회의 부흥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교회가 배출하는 자녀들이기에, 그들을 낳은 공동체의 수준보다 더 높이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들과 교회들이 다 합세하여 신앙 부흥을 위해서 선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목회자들의 부흥이 앞서지 않고는 교회가 새롭게 소생될 희망이 거의 미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곧 교회가 먼저 영적으로 소생하는 것과 연관되지 않는 목회직의 부흥은 거의 바랄 수 없다. 목사들과 교회들은 서로 상호간에 작용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목사들과 교회들이 더 진지한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목사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일을 추구하도록 하고, 성도들은 목사들의 목회를 위해서 그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목사들이 성도들을 인도하지 못할 것이면, 성도들이 목사들을 인도하도록 합시다. 더 나은 교회가 더 나은 목회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목사 후보생 발견의 중요성


목회자들이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자신들 속에서 이 거룩한 성직을 위해서 가장 좋은 은사와 경건을 가진 자들을 불러내는 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숙고했던 원리를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직무를 명하는 일 속에서 살펴봅시다. 사도로 시작하여 집사에 이르기까지, 그 직임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살펴보라는 요청이 주어졌습니다. 사도나 집사된 자들이 스스로 나서기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합당한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젊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지식을 탐구하느라고 열심내어 다른 일에는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한 책벌레가 이런 일에 적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을 위한 갈증에다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쓰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구를 겸하여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일에 적합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회에서 보다 존경 받는 계층에 속한 젊은이들이 그러하다거나, 선한 사회에 속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신사의 품격과 습관을 익힌 젊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열등한 세속적 매너를 가진 하층 반열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도 그들의 출신 성분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가 있다면, 아직 세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 속에 엉겨 붙어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면 그 영적인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얼마나 더 고조될 것이며, 거칠고 흐릿한 모든 것을 닦아내어 윤기를 내면 그 가치는 얼마나 더 빛나겠습니까!


목회자 전문대학의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보편적인 원칙은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그러한 보편적인 원칙을 결코 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사고방식과 따뜻한 마음과 간절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위해서 예외 규정을 둔 원칙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날카롭지 못하나 뭉뚝한 힘 있는 칼이, 아주 예리하게 갈아 눈부시게 날이 선 많은 무기들보다 더 많은 전적(戰績)을 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사다운 예법을 갖춘 사람 속에는 목회자로서의 품격에 긴요한 은혜로움과 쓸모를 상승시키는 것이 아주, 아주 많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선비의 예법에다가 선지자의 충성을 더하였고, 순교자의 단호한 용기 위에다 신사다운 정중함의 망토를 걸쳐 입은 셈입니다. 간절한 열심이 그 우아함을 통해서 더 효과를 발하게 되고, 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거룩한 목회직에 나아가도록 보내는 것의 중요성도 그 우아함으로 인해서 더 부각이 됩니다.


. 노사역자들과 교제하는 유익


저는 지나간 어느 시대의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좋고, 그들을 기억하면 유쾌해지며, 그들은 마지막까지 그 열심의 열기를 계속 견지하였고, 그 수고는 마치 눈 덮힌 산꼭대기에서 분출하여 폭발하는 화산의 화염같이 그 하얀 머리와 연합하여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해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날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지런한 자세를 느슨하게 하는 대신 더 힘써 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할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낫을 잡을 힘이 있거나 곡식 다발을 묶기에 필요한 빛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동안에는 일해 나갑시다. 금방 추수하는 일이 완료될 것입니다. 그때가 당도하게 되면 그때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되신 주님과 우리의 동료 종들을 그때에는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이 엄숙한 강조점을 달고 다가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9:10).


더 젊은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가 더 부지런해집시다. 그들은 우리를 자기들의 본으로 삼으려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앞에 좋은 본보기로 삼고 강한 영감의 힘을 불어 넣을 모범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에 지쳐 더 이상 섬기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유유자적하며 여가를 보내고 있는 모양을 보이는 식으로 우리의 경주에서 이탈하지 맙시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의 열심이 우리의 몸의 힘을 주어 우리의 노년의 연약을 털어내고 우리의 원기를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고 있음을 보여줍시다.


노병(老兵)을 쳐다보는 것은 군인의 영예를 크게 찬탄하는 사람이 주목하기를 좋아하는 광경입니다. 그 노병의 얼굴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작전의 수많은 세월과 그의 원수들의 칼끝이 함께 작용하여 남긴 상처들이 있습니다. 용기와 무기를 다루는 능란한 솜씨와 민첩한 동작으로 떨쳐 일어났습니다. 그 노병 옆에서 싸우는 모든 젊은 전사들은 그 노병이 자신의 힘을 다해 젊은 병사들의 유약한 마음을 추슬러주는 모습을 봅니다. 임마누엘의 대군에 속한 노병들이여, 그대들의 의무를 보여줄지어다! 그대 노병들에게 젊은 목사 후보생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성품을 형성 짓게 하는 책임을 위임하도다. 젊은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영웅들 옆에 있음을 느끼게 하며 그대 노병들의 영웅주의의 영감을 포착하게 할지어다. 그대 노병들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에게 그림자를 비출지어다. 그러면 그대들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올라가면서 떨어뜨린 겉옷을 찾기를 희망할 것이로다. 젊은 목사 후보생들로 하여금 그대들 노병들이 죄인들의 회심을 항상 목적하고 있음을 보게 하며, 영혼 구원의 일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일지어다. 그대 노병들의 대화에서 이 영혼 구원하는 일에 마음이 얼마나 깊이 착념돼 있는지를 듣게 할지어다. 그대들이 목회 사역을 마쳐가고 있는 모습을 그 젊은이들로 보게 하여, 어떻게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고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일지어다. 그들의 실수를 바로 잡아주며, 내려뜨려진 그대의 팔을 세워주며 그들의 열심을 더욱 불 일으켜 주시라.


그대들이 젊은 그 사람들과 사적인 교류를 함으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의 성품을 바르게 형성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목회 사역에서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들에게 온유하게 대화로 가르쳐주며, 이 높고 영광스러운 성취에 이르는 성공을 어떻게 이룩하였는지 말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열정을 더욱 불 일으켜 세워주거나 아니면 꺼버리는 영향력에 위치해 있는 여러분이 마땅히 어떠한 사람됨의 자세를 가져야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사역자들에게 충분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젊은 형제들이여, 그것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쓸모 있기를 간절하게 탐하고 있습니까? ‘간절한 열심이야말로 그 점에 있어서 진수입니다. 그런 열심이 없이는 어느 정도라도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보다 앞서 목회를 했던 사람들의 말을 청종하십시오. 그들의 증언은 체험과 관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모든 요점들이 간절한 열심을 내라.’는 이 권고 속에 들어 있습니다.


본질과 은혜의 하나님께서 처방하신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쓸모 있기를 바라고 결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쓸모 있다 여기는 새 길을 열려는 실험을 결심하지도 마십시오. 사도들이나 순교자들이나 종교 개혁자들이 밟았던 길,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목사들이나 선교사들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았던 그 길 외에는 다른 길을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능력과 학식으로 현 시대의 계몽정신(啓蒙精神)에 더 부합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그릇되어 나가고, 자기 생애를 끝마칠 즈음에는 자기 어리석음을 슬퍼하고, 자기의 목회 생활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모험이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런 우울한 고백을 사람들이 적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신 일을 돌아보면 감사하고 놀라운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면서도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후회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주제를 우리 목회의 주제로 삼았고, 영혼 구원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였다는 고요하고 달콤한 만족을 가지면서, 아울러 그 일에 보다 더 집중적인 헌신을 하지 못한데 대한 깊은 송구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르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그 영광스런 목적에 있어서는 전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맞게 개선했을만한 국면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목적을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방식들 안에서만 그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또 다시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시거나, 잘못된 것으로부터 바르게 고쳐 말하도록 할 기회가 허락되거나, 또 다른 삶의 기간을 보내도록 허락하시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다면, 학문과 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대단히 감탄해 마지않는 것을 더 많이 얻고자하는 대단한 결심을 하겠죠.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교리를 더 힘 있게 설교하고, 더 많은 열정으로 그 일을 추구하기에 더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 주고, 우리 목회 사역의 목표를 더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게 한다는 보장의 한계 내에서만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대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그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린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고 갈수록 더 가치 없어 보이고, 대신 우리의 위대하신 구주의 인정을 받을 소원이 더 갈수록 강력해집니다. 우리가 과거를 뒤돌아보던지, 현재 느끼는 우리의 마음의 감상을 숙고해보던지, 아니면 우리의 장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해 보던지 간에, 목회 사역의 초반기에 있는 젊은 사역자들에게 그 삶의 목적을 위하여 더 충분하고 적절한 논증이나 더 충분하게 표현된 권면의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뿐입니다.

간절한 열심을 내어라”(Be in Earnest).


. 학생 선발에 신중해야 할 신학대학


젊은 사람들을 목회자로 양성하기 위해 전문대학에 들여보내고 받는 일에 상당한 주의와 경계가 요청됩니다.


모든 교파의 교회들마다 앞뒤가 맞지 않게 행동하는 목사들로 인하여 불명예를 무릅써야 했습니다. 무자격 목사들이 교회의 모든 교파들에서 짐이 되고 있으며, 세상에서 복음을 진보시키는데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어떻게 저런 이들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이 그 마음에 들어왔는지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목사 후보생으로 추천한 목사가 누군지, 어떤 노회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들였는지 생각해보면 의문은 두 배로 커집니다.


한 젊은 사람을 목회길로 들어가도록 추천하는 책임은 얼마나 큰지요! 그 일은 그 일이 가져올 엄청난 성질의 결과들을 몰고 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극히 세심하고 주의를 요하지 않고는 해서는 안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전보다 우리 목회자들이 그 일에 주도권을 가지고 목사 후보생 적격성 여부를 훨씬 더 세심하게 분별해내도록 해야 합니다. 목회자 양성 전문대학의 당국자들도 부적격 후보생들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적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부적격자 백 명보다는 자격을 가진 성실한 사람들 몇이 더 낫고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 신학대학 교수들의 자질


목회자와 설교자를 만들어내는 금형(金型) 틀과 같은 곳이 목회자 대학이라면, 그 금형을 모양 짓고 거기에 금속 녹은 물을 붙는 사람은 그 목회자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그런 일을 감당하는 사랑스럽고 존귀어린 그 교수 형제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까! 그들이 어떠한 신뢰를 받아야 하며, 얼마나 엄숙하고 얼마나 외경스럽고 얼마나 책임 있는 짐이 주어져 있습니까! 한 목회자가 한 개교회를 돌보는 일이 정말 중차대한 일이라면, 목회자 신학 대학의 교수가 많은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돌본다는 것은 얼마나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까? 그 배우는 학생들 하나하나가 목회자로서 나갈 뜻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의 능력은 우리 목회자들의 목회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목회 사역의 힘은 우리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 대학에 달려 있습니다. 또 신학 대학의 힘은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정말 이런 시스템보다도 더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수들이 강해적 설교’, ‘설교로 전해지는 강해를 하는 설교자들을 훈련시키되, 모두 다 생명력을 가지고 진수적으로 대중 설교를 할 사람들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교수들은 교호에 보낼 사람들을 훈련시키되, 영적 미각을 연마시킬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을 나누어주고 지성을 존중하며, 교회 일반 공동체의 품격에 무게와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야에서 성취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좋죠.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중차대한 주제를 위해서 언제나 요청되는 것, 특별히 이와 같은 시대에 진정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걸맞게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사들의 부류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대학 교수들이 우리를 위해서 그러한 목사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 최우선 지원 대상 신학대학


목회의 소명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면,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방편을 제공하는 것 역시 교회의 마땅한 의무여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 대학에 많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목회자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갈수록 자기 스스로 등록금을 충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을 잘 교육하는 일이야말로 아무리 댓가를 크게 지불한다 할지라도 결코 과용한 게 아닙니다. 말하기는 좀 이상하지만, 해외 선교나 국내 선교를 위해서 우리 교단 내에 속한 모든 교회들 거의 대부분에서 모금한 헌금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 대학을 위해서 매년 헌금하기로 허락한 교회들은 얼마나 극소수에 불과한지요! 그러한 헌금을 전혀 허락지 않은 교회들은 얼마나 부지기수인지요! 우리의 목회자 양성 시스템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분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이 문제를 내버려두고 우선순위에서 맨 뒤로 밀려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들이 힘을 합치고, 풍부한 재산을 가진 개인들이 합세하여 이 특이한 시대 환경에 적응하는 목사를 길러내는 교육을 위해 필요한 모든 걸 공급할 책임을 잘 숙고하도록 합시다!


Chapter 11, 목회 사역과 신적 감동의 함수 관계


이제 그 목회 사역의 효력을 위해 반드시 필수적인 신적(神的)작용에 관하여 말할 차례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인간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役事)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채용된 방편과 연관하여 사람을 두 국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곧 사람은 이성적(理性的)인 피조물이면서 아울러 죄악적인 피조물입니다(이성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그런 존재가 인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어떤 방식을 채용하든지 간에 항상 이 조건을 염두에 두고 인간을 다루어야 합니다.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논증을 통해서 사람의 지성에 호소해야 하며, 여러 동기들을 제시함으로 마음에 호소해야 합니다. 은혜의 방편 특히 설교를 통해서 인간의 지성과 마음에 호소하는 일이 주어지고 있는데, 설교에는 지성에 제시되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설교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조처를 나타내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설교 내용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자세에 있어서도 회중에게 다가오는 적응성(適應性)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자세로 말미암아 회중들의 관심이 아무리 촉발되었다 할지라도(물론 회심하기 위해서는 회중들의 관심을 반드시 촉발하는 일이 있어야 함), 죄인은 마음이 여전히 진리와 대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의 감동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이는 이성적인 존재인 사람의 지성적 촉각을 자극하여 관심을 끌어낼 것이 없습니다. 아울러 성령님이 아니시면 아무도 자기에게 제시된 진리를 마음으로 달게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회심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성령께서 함께 작용하는 셈입니다.


설교자의 자세가 아무리 간절한 열심을 보이고, 그가 다루는 설교 내용이 아무리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 한 그걸 듣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령님을 깊고 실천적이고 부단한 방식으로 의존하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하려고 들지 않을 정도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확신으로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강해지며 그 권능의 힘 아래서만 능력 있게 됨을 느끼게 만들 정도의 그 확신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러한 확신 아래서 우리의 연구를 진행해나가고, 우리의 골방 기도를 해 나갑니까? 어린아이 같은 단순성으로, 우리 설교를 듣는 자들이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깨닫도록 해 주는 정신으로 신적 작용자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복락을 바라고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던집니까? 설교본문을 선택하는 지혜와 우리 설교를 작성하는 지혜를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서 생각하고 글을 쓸 때에 우리 마음과 눈을 하늘을 향하게 합니까? 강단에 올라갈 때 설교하는 자로서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올라갑니까? 설교할 때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전능하신 이의 능력으로 옷 입히고, 우리 주님을 항상 앞서 나가시게 합니까? 우리 앞에 있는 불멸의 모든 영혼들을 생각할 때 인간의 칭찬이나 비판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만이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어두운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심령도 밝히 조명할 수 없습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도 부드럽게 하거나, 구원을 열망하는 한 영혼도 바르게 지도할 수 있거나, 상처 받은 한 심령을 치료할 수 있거나, 불안한 심령으로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그러한 의식은 우리 영혼의 힘을 조금도 제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의 힘도 방해하거나 우리 자신의 불을 결코 끄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집중력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의식은 설교할 때 말로 할 수 없는 큰 이점을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곧 진지함과 자애로움과 위엄이 우리의 강론 전체에 배어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 영혼은 도움을 받지 않은 최상의 재능으로도 넘나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초월적인 감화가 우리에게 머물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밝게 빛나게 할 것이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 속에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깊고 실천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며, 골방으로 나아가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우리 목회가 보다 더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 영혼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누리는 마음의 진정한 기쁨을 더 자주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도하는 목회사역은 반드시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간절한 열심을 가진 목회 사역은 기도하는 목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대의 모든 조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만큼 보다 더 간절한 열심의 간구를 넘치게 드려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달리 뽑아낼 수 없다면 연구하는시간이나 잠자는 시간에서 뽑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운 감화를 간청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할 권리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부산한 활동이나 모임을 수도 없이 가지는 일 때문에 집중적 경건의 의식을 마음에서 밀어 내쫓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처럼 기도가 더 필요한 사람들이 없었고, 우리처럼 기도를 게을리 하는 위험에 처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일을 느슨하게 하지는 맙시다. 그러나 기도가 더 넘치게 해야 합니다. 지성의 광선을 꺼버리지 맙시다. 그러나 거기에다가 경건의 뜨거움을 더합시다. 영혼 구원이 우리 자신의 힘 자체에 달려 있는 것처럼 노력은 합시다. 그러나 사도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을 할 때에 가졌던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집시다.


우리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영원한 운명이 우리 자신의 설교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도에도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목적을 이행합니다.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골방에서도 말입니다. 이 이중적 끈질김, 처음에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탄원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께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사고 탄원하는 그 이중적 끈질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새 언약의 성공적인 일꾼이 되리란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음을 인식합시다.



존 에인절 제임스(John Angell James, 1785-1859)

한츠숴의 고스포트 소재 데이비드 보그 대학에서 공부. 버밍험의 칼스 레인 회중교회55년간 섬. 존 웨슬리(1703-1791)사후로부터 찰스 스펄전(1834-1892)의 출현 때까지 지도자로 활동. 스펄전 목사님에게 영적 도전과 감화를 준 목사님들 중에 한 분(리처드 백스터). 구원을 열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