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ㅡOther Works

예정론(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1 -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Bavinck Byeon 2014. 6. 22. 11:03

믿음의 시작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그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부터 먼저 밝혀야만 하겠다. 이것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분량의 글을 쓴 일이 있지만, 가능한 한 조금 더 자세하게 밝혀 보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끌어들였던 신적 증거들이 믿음 그 자체는 우리들의 것이고 그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에 대한 답변부터 해야 하겠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장만을 하게 하신다면, 믿음을 가지는 근거가 되는 공로는 우리들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 감독들의 재판에서 정죄를 당했던 펠라기우스가 가졌던 견해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그런 견해는 당시의 판결기록에서 드러난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의 공로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를 믿기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충만하고도 완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작을 가진 이후에, 그 위에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밖의 것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충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생각에 맞서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5,36)라고 하신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우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믿음의 시작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겠는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만한 다른 것도 상상할 수 없다. 오직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데도 이미 믿기를 시작한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보다 먼저 사람에게 이미 그만한 공로가 있고 그 밖의 것들이 하나님의 보충에 의해 더해진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정죄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정죄를 받아야 할 이 견해를 피하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펠라기우스에게 사도께서 모든 신실함으로 말씀하여 주셨던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는 말씀에 주목을 했었다.


사도께서 믿음과 고난 모두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은 이 둘 모두를 주신 바 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도께서는 "그를 더욱 충분하고 완전하게 믿을 뿐 아니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믿을 뿐 아니라"고만 말씀했다. 또 자신이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더욱 충성된 자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충성된 자가 되어"(고전 7:25)라고만 말씀을 하신 것도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충성을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충성을 성숙케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충성된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만드셨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사도께서 믿음을 가지기 시작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에서 그것이 읽혀질 때마다 자기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께서는 믿음을 버리도록 파괴하고 또 그 믿음에 열렬히 반대했던 자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강한 은혜로 말미암아 그 믿음에로의 갑작스런 개종을 하였고, 선지자가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시 85:6)라고 말씀한 바로 그것을 행하신 이에게로 돌아섰었다. 그리하여 믿기를 거절하던 자가 자원하여 믿는 자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을 하던 자가 자신이 핍박을 하던 바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을 당하는 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찬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께서는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선한 공로의 원인됨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들의 몫이고 믿음을 성숙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주목을 하여 매우 신중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믿는 것보다 우선함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믿을만하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대개 의지로 믿으려 하기 전에 갑작스럽고도 신속하게 생각을 먼저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롭게 살피게 되는데, 믿음과 생각은 사실상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믿어지는 모든 것들은 필히 생각한 다음에 뒤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믿음 그 자체는 찬동을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기 위해서 생각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모두가 생각을 한다. 믿으면서 생각하기도 하고, 생각하면서 믿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와 경건은 서로 하나이기에 우리가 무슨 일에서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할 수 없고, 또 우리의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생각이 없이는 믿을 수가 없음으로 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우리의 만족, 즉 우리의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기 스스로 만족하여 어떤 선한 일을 시작하거나 완성할 수는 없다. 그대가 써 보낸 내용에서 이미 동의한 받와 같이 그대가 사랑하는 이 형제들이 모든 선한 행위를 하기 시작한 것, 즉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믿음의 시작이나 완성에 있어 아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만일 믿음이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면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을 생각할 때는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각각 독특한 존재로 구별하게 만든다


사도께서 여기서 인간의 교만을 경계하사 어떠한 사람에게도 영광을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의도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하나님의 자연적인 은사들, 즉 그것이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어질 때와 동일하게 사람의 전체에 온전한 본성으로 남아 있든지 아니면 부패한 본성이 되었든지 간에 그 자연적인 은사들에 영광을 돌리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그런 은사들만으로 어떻게 사람이 구별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께서는 먼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는 이어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덧붙이셨다.


사람은 남을 누르고 높아지려 하기 때문에 "내 믿음이 나를 구별케 한다"라고 하거나 "내 의, 또는 그 밖의 것이 나를 구별케 한다"고 말하려 할 것이다. 그러한 태도에 대해 훌륭한 교사는 말씀하기를,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대에게 베푸신 것을 베풀어주시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그대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그대를 구별하였겠는가? 그래서 사도께서는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께서 사람이 주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영광을 돌리는 것을 지적하려고 의도하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즉 의인을 악인과 구별하게 하고 따라서 의인과 악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이 자기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이 말씀과 정반대가 될 뿐이다. 은혜가 우리를 살아있는 이성적 존재로 만들었고, 짐승과 구별되게 하였으며, 그것으로 우리의 본성이 되게 하였다. 또 은혜가 우리들 중에 어떤 이는 잘생긴 자로 또 어떤 이는 못생긴 자로 만들었고, 어떤 이들은 어리석은 자와 구별하여 지혜롭게 하였으며, 우리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구별되게 하였다.


하지만 사도께서 꾸짖고 있는 자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악한 자라도 가질 수 있는바 자연적으로 베풀어진 은사와 관련하여 자신을 짐승이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을 하는 자가 아니다. 즉 거룩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어떤 좋은 은사를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돌리고 그것으로 자랑을 삼는 자를 꾸짖고자 하신 말씀이다. 그런 자들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책망을 들어서 마땅하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본성에서부터 나온다 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 역시 본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그래서 사도께서는 "네게 있는 능력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처럼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것까지를 포함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으로 부여된 본성이 우리를 구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믿는 자를 믿지 않는 자들과 구별되게 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스스로 믿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처럼 가장 분명한 사실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인간 의지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믿고자 하는 택자들의 의지 자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준비되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말씀은 사람의 의지 속에 있는 믿음 그 자체까지도 은혜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임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선택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에서부터 비롯된다


"많은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듣지만 어떤 사람은 믿고 다른 사람은 거절을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믿기를 원하는 자이고, 거절하는 자는 믿기를 원하지 않는 자이다." 누가 이 사실을 모르겠는가? 누가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믿는 자에게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의지가 준비되어지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준비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되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께서는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롬 11:7-10)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자비와 심판,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인 택자들을 향한 자비와 보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한 심판이 있다.


믿는 자들은 믿기를 바랐기 때문에 믿었고, 믿지 않는 자들은 믿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비와 심판은 의지 그 자체에 따라서 나타난다. 분명히 그 선택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어떠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께서는 앞에서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택자는 값없이 얻은 것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보다 먼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 그것은 다시금 얻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가 없이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보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그 보지 못함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가로 분명하게 선포되어진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측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자비로 값없이 구원을 하시는 것과, 진리로 정당하게 심판을 하시는 것을 모두 다 측량할 수가 없다.


믿음이란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유


믿음은 그 시작뿐만 아니라 그 완성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가장 분명하고도 거룩한 말씀을 거스르지 않는 한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는 왜 이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가장 공의로운 정죄에 이르되 그 중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왜 결코 허물이 없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위대하신 은혜가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것과 그 구원은 구원받은 당사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므로, 사람은 정죄 받을 자들의 공로와 다를 바 없는 자기 자신의 공로에 영광을 돌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다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말씀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밀 속에 감추신 것을 감히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려 들지를 말고,  차라리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힐문하느뇨"(롬 9:20)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정과 은혜의 차이점


나는 - 구원 받을만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구원이 베풀어지지 않았다고 말을 하거나 질문을 제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 인간의 의지로 말미암아 "이 종교의 구원이 받아야 할 사람에게 베풀어지지 않는 일이 없고 받지 못할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일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예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를 말하고 있다.


은혜와 예정에는 단 한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예정은 은혜의 준비이고, 주어짐 그 자체이다. 이 때문에 사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9)라고 하셨다. 이것은 은혜를 가리킨 말씀이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는데, 이것은 예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는 예정을 가리킨 말씀이다.


하지만 예지는 예정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시려 하는 것들을 예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장래에 있을 것들을 만들었나니"(사 45:11)라고 말씀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지 않으시는 것들, 즉 온갖 죄악들까지도 예지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롬 1:28)라고 하신 말씀에는 죄의 형벌도 포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것처럼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에 대한 준비이고 은혜는 그 예정의 집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통해 열국에 대한 믿음을 약속하실 때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고 하셨고, 사도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롬 4: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의지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예정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하려고 하시는 것을 약속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함에 포함된 선행을 행할 때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행하시도록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지를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셨다."(롬 4:21). 하나님은 낯선 자의 행함도 미리 말씀하실 수 있고, 미리 아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미리 말씀하신", 즉 "미리 아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이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다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위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정에 대한 가장 분명한 사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정과 은혜에 대한 가장 분명한 사례의 빛은 구주 자신,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인성에 있어 행함이든 믿음이든 간에 선행하던 공로가 있었기에 기도를 통해 구주가 되셨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보자. 사람이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영원하신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와 인격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또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셨는가? 그 분 안에 선행하던 어떤 선이 있었기 때문이었는가? 그러면 그 전에 무엇을 행하셨던가? 그가 무엇을 믿으셨던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탁월성을 얻기 위하여, 그가 무엇을 간구하셨던가?


사람인 그가 존재하기 시작하시던 때, 즉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기 시작하셨을 때에 말씀으로서의 행위나 의도하셨던 바가 과연 있었던가? 오히려 다만 여인이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로 잉태되지 않았던가? 그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즉 육체의 욕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독생자로 태어나지 않았던가? 그가 성장하였을 때,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죄를 범할까 하여 두려워하신 일이 있었던가? 또 이것 때문에 그의 의지가 자유롭지 못한 일이 있었던가? 그는 오히려 죄의 종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한 그만큼 더 많은 자유를 누리 않으셨던가? 그의 인성(말하자면 우리의 본성)은 분명히 놀라운 온갖 은혜들을 받았었다.


그러나 오직 그에게만 독특하게 주어졌다고 해야 할 특성들은 선행하는 그 자신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왜 나는 그렇지를 못합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라고 한 말씀을 듣고 스스로 자제하여, 뻔뻔스러움에 가득 찬 나머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이런 말이 내게 들리느뇨, 나는 내가 들은 그대로 있느니라, 사람과 내가 말한 이가 동일하지 않느뇨. 왜 내가 그가 존재하는 대로 존재할 수 없겠느뇨. 그가 그와 같이 위대하게 되심은 은혜로 된 것이니, 그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임하는 은혜와 무엇이 다르겠느뇨.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느니라"고 하는 말을 듣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신 그리스도


그러므로 은혜의 샘이시며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께서 그 은혜를 자신의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나누어 주시도록 해야 한다. 이 은혜가 각 사람에게서 믿음을 시작하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데, 그 은혜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 되게 한 그 은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을 중생하게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다.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죄의 효과를 일으키셨고, 이 성령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이렇게 행하실 것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 예정은 거룩한 자 중에 거룩한 자이신 분에게서 가장 특별하게 드러났었던 성도들의 예정과 동일하다.


선포된 진리를 정당하게 이해하는 자라면, 이 예정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되셨다는 점에서 살펴볼 때,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예정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의 사도께서는 로마서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예정하심에 따라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이 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람이 오류 없이 독특한 사람으로 되셨기에, 그는 진정으로 그리고 독특하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는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위일체가 아니라 삼위일체이시다.


그는 참으로 위대하고도 고상하고 또 탁월하게 인성을 취하시도록 예정되셨으므로, 그의 인성에는 필요 이상의 높임이 없다. 이것은 마치 그의 신성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는 육체의 연약함을 가진 인성을 가진 것으로 인하여, 필요 이상으로 낮아지지 않았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우리의 머리로 예정된 것과 같이 많은 우리들도 그의 지체들로 예정이 되었다. 따라서 아담을 통해 들어온 망하게 된 인간의 행위는 거론하지 말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오 유일한 주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머리되신 분 안에서 그의 세대보다 선행하는 행위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자는 그 분의 지체인 우리들 안에서도 중생하기 전에 행했던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세대가 이어진 것이 아니라 새롭게 주어졌다. 그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모든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우리에게 어떤 공로의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만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중생의 씻음을 경험하게 한다면, 우리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임으로, 우리는 구원하여 주시는 중생을 또 다시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이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믿어야 할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시작케 하고 또 온전케 하기 위하여, 믿음의 시작과 마침인 예수님을 사람이 되게 하셨다. 그대도 아는 봐와 같이 히브리서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히 12:2)


두 가지의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의 자녀로 예정된 많은 자들을 부르사 유일하게 예정된 그의 아들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그 부르심은 혼인 잔치에 나오지 않은 자들을 향해 부르셨던 것과 같은 부르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거절을 했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았던 이방인들은 그 부르심을 어리석게 여겼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르심은 예정된 자를 향한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은 사도께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전파했다고 말씀하셨을 때의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사도께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고전 1:24)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부르심을 받지 않은 자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미리 아신바 되고 예정된바 된 자에 대한 부르심이라야 확실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사도께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롬 9:11,12)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러한 부르심을 의미한 것이었다. 사도께서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는 자로 말미암아'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부르심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된다. 사도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렸다. 그래서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부르심은 다른 어떤 부르심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믿는 자가 되게 하는 그 부르심이다.


택함 받은 자를 향한 특별한 부르심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택함을 입히는 부르심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도 친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6:16)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이 부르심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셨다. 만일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택함을 받았다면, 주를 믿는 그 믿음으로 그들이 먼저 선택을 한 것이 될 것이요, 따라서 당연한 대가로 택함을 입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들은 자기들이 주를 믿을 때에 자기들 자신이 주를 선택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을 한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선택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대가가 아닌 주님의 자비가 그들의 믿음보다 우선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성자께서 육체를 입으실 때에 세상 밖으로 택하심을 입었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성자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것이다. 이것은 예정과 은혜에 대한 변함이 없는 진리이다.


무엇 때문에 사도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라고 말씀을 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즉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것이란 그들이 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입을 것에 대한 사실을 의미한다면, 성자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예지를 거역해서 말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택함을 입은 것은 예정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하고자 하시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던 때인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심을 받아 세상 밖으로 택하심을 입는 것을 통해 자신이 예정하신 것을 성취하실 뿐이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목적에 따라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심을 통해 불러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정하신 자들만을 또한 부르신다. 그리고 부르신 자들만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끝없이 영화롭게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택하시되, 이미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게 하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다.


사도 야고보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후사를 삼으시고 믿음으로 부요하게 만드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시는 것은 자신이 택하셨던 것을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나는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도, 누가 감히 사람은 택함을 받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도록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는 사람이 먼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택했다고 함으로써, 진리의 판단을 외면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