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formation

무엇이 우리의 신앙성장을 방해하는가? - R. C. 스프롤(R.C.Sproul)

Bavinck Byeon 2015. 8. 9. 17:01

무엇이 우리의 신앙성장을 방해하는가?

 

R. C. 스프롤(R.C.Sproul)

 

 

1980년대에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에서 미국인들의 종교에 관해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정확한 경향 분석과 지표들이 여러 분야의 잡지에 게재되고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집된 다양한 자료는 널리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갤럽은 그 자료들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제공했고, 그 후 몇몇 신학들을 선발해서 그 정보의 의의를 검토하고 평가하게 했다. 나도 거기 속하여 자료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은 한층 주목을 끌었다.

 

1) 미국인 6천만 이상이 개인적으로 회심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한다.

2) 상당한 비율의 미국인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달리 미국인들, 아니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성경의 내용을 너무도 모르며, 기독교 역사와 고전적인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지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성경적 신앙을 갖고 있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회문화 구조와 가치관에 거의, 아니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예를 들어 최근 성윤리와 낙태 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에 따르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행동 방식에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이 연구 조사가 전달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이 사람들의 생활이나 문화에 전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회심을 체험했다고 믿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회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반이라도 실제로 거듭났다면, 우리 사회는 대각성운동보다 한층 더 대대적인 부흥을 경험했어야 한다.

이러한 부흥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왜 그토록 미약한지 따져봐야 한다. 실제로 부흥과 개혁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심각한 상태다. 개혁이 결여된 부흥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날조된 것이다. 이것은 부흥을 경험한 진실한 성경적 신앙이 아니다.

 

이러한 기현상을 보다 낙관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이러한 부흥이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중생을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다. 그들이 영적 성숙에 이르면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세상 문화에서도 십 대들은 가치 체제에 큰 영향을 주지만 권력과 실력을 행사하는 성인들만큼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문화의 가치 기준 형성에 실제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우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른다. 어린아이는 가정이나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만큼 사고나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은 성장해야 한다. 그들이 가정이나 지역 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숙하여 가정과 지역 사회와 국가와 이 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길 소망한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해 요소를 극복해야 한다. 그 방해 요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10가지 요소다.

 

방해요소 1.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영적으로 이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믿음의 성경적 의미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분명히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하나의 덕목으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0:15).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와 같은이라는 말은 비유를 쓸 때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비유는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신뢰하고 부모의 말을 받아들인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호기심 많은 아이가 활활 타고 있는 난로로 다가갈 때, 엄마는 안 돼!”하고 소리친다. 열에너지가 이러니저러니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다. 그런 복잡한 설명은 아이에게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점 부모에게 따지고 노골적으로 반항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러한 반항이 발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히 하늘 아버지에 대한 경외와 신뢰 가운데 살아간다. 이것이 절대적인 믿음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분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childlike) 믿음어린아이의(childish) 믿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가 자주 혼동된다. 어린아이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깊이 있게 알아가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젖만 먹으려 하고 단단한 음식은 거부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다음의 권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5:12-14).

 

신약성경은 신자의 성숙을 요구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바울은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할 영역과 장성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영역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해준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방해요소 2. 회의적 신학에 대한 두려움

 

기독교 문화에는 신학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신학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많은 경우 신학자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국 국교회의 유명한 변증론자인 랭미드 카설리(J. v. Langmead Casserley)는 그의 저서 <기독교 변증론과 복음>(Apologetics & Evangelism)에서 한 장 전체를 지식인들의 배신이라는 주제에 할애했다. 카설리는 신학자들에 대한 기독교계의 불신은 현대 고등비평 학자들에 의해 나타난,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를 향한 극단적 회의론에 자극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이들은 교회에 몸담은 신학자들이었다. 성경의 신뢰성을 가장 목청 높여 공격한 이들이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의 교수들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네덜란드의 신학자인 에이브러햄 카이퍼(Abraham Kuyper)성경 비평은 이제 성경 파괴가 되었다.”라고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신학교들이 불신앙의 거점이 되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기독교대학에서 교수들의 영향을 받아 의심과 불신앙을 갖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럴 바엔 차라리 신학에서 손을 떼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낳았다.

분명 해로운 신학이 있다. 진지한 신학 연구가 학생들을 회의적 비평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신학의 많은 부분이 신학자들의 자기 불신앙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신학계에 회의적 신학이 만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 사역 초기의 주요 반대 세력은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신학을 증오했다. 그러므로 해로운 신학을 피하기 위해 모든 신학과 신학 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 자살 행위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배신을 자초하는 것이다. 신학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 과목이 아닌 필수 과목이다.

 

방해요소 3. 안이한 신앙

 

안이한 신앙은 고대 율법폐기론의 한 형태다. 안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거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분을 주님으로 모실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속하는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만 하고 주님으로 모실 필요는 없다고 가르치는 교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다 영적이어야 함과 순종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야 한다고 선포하는 것은 꺼린다. 실제로 그들은 구원받는 데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설 자리를 남겨 두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폐기론의 양태는 복음주의 안에 팽배해 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입장이다. 최그의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도 이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최근에 어느 목사가 자신이 시무하는 교외의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청년은 마약을 하고 이성과 부정한 관계를 가졌다. 때문에 목사는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상담해주려고 했다. 그 청년은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목사님. 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자는 배우는 자다. 그리스도의 자제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등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호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하나님의 것을 학습하기 위한 훈련이 요구된다.

 

방해요소 4. () 수도원 제도

 

교회사에 나타난 수도원 제도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미화하는 성격도 있었다. 수도원으로 도피한 이들은 죄악된 사회의 전횡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은신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즉 수도원은 영적 정결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수도원에 입문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기도와 영적 예배 생활을 추구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수도원 생활을 세상과 격리되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옛날 수도원 제도의 한 요소였던 깊은 신학 연구가 신 수도원 제도에서는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신 수도원 제도란 일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즉 세상으로부터 이탈하는경향을 일컫는다. 나는 그들의 생활 방식은 물론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성을 부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1차적 활동 무대인 세상을 거부한다.

신 수도원 제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범위를 영적 고립 지역 안으로 제한시킨다. 여기에는 명백하게 복음과 관계된 것이 아니면 연구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거부 반응도 포함된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2년째 되던 해에, 대학 2학년이었던 나는 서양 철학 수업 시간에 영혼이 깊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강의는 아우구스티누스 소론에 관한 것이었다. 그 강의는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보다 깊이 있는 믿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데 큰 도움을 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밖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었다.

결국 성경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전공을 바꿀 때쯤 나는 복음 동아리에서 거의 탈퇴한 상태였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절을 보고 반감을 가졌다. 나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2:8)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고 친구들의 그러한 반응 때문에 상처도 받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건히 하기 위해 철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더 이상 성경이 전공과목은 아니었지만 성경, 혹은 성경공부를 거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먼저 정확히 알지(aware)도 못한 채 어떻게 주의‘(beware)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속 철학 공부는 나에게 성경에 계시된 것들의 깊이와 부요함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켜 주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중대 과제인 변증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었다. 즉 이교도들의 손에 이 세상을 버려 둘 수 없었다.

 

신 수도원 제도는 무지를 낳는다. 문화와 문화를 형성하는 사상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신학에 대한 무지도 낳는다. 이것은 믿음의 힘보다 믿음의 결여를 드러낸다.

또한 신 수도원 제도의 영향력은 파괴적이다.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는 은둔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무 태만으로 인한 패배를 겪어왔다. 미국 문화의 세속화를 비통해하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의아해하는 것이다.

 

방해요소 5. 논쟁을 꺼림

 

신학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언제나 그렇다. 신학을 연구할 때면 반드시 논쟁이 뒤따른다. 우리 모두는 평화와 연합을 원한다. 성경이 다툼, 분열, 쟁론, 비판을 금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온유, 오래 참음, 자비 등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

때문에 다툼의 영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신학에 대한 연구를 피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종교와 정치에 관해서는 토론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생활의 기본 에티켓으로 여겨지는 것은 종교와 정치에 관한 토론이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주기보다 열을 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상 신학 논쟁으로 빚어진 중상모략, 박해, 종교 전쟁에 신물이 났다.

 

반면, 논쟁은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존 스토트(John Stott)<논쟁자 그리스도>(Christ the Cntroversiallst)라는 책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생애가 격렬한 논쟁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도들 역시 선대의 선지자들처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논쟁을 벌였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시장에서 사람들과 논쟁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논쟁을 회피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진리가 버려지는 곳에서 얻는 평화라면 그것은 비굴하고 육적인 평화다.

 

다만 하나님 없는 논쟁은 피해야 한다. 하나님 함께하시는 논쟁을 해야 한다. 논쟁의 긍정적 측면 한 가지는 진리, 특히 신학적 진리가 영원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 하나님 없는 논쟁은 논쟁하는 사람들이 신학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들은 비중 있는 쟁점들과 문제 되지 않는 사소한 쟁점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다. “적은 지식은 위험을 초래한다.”는 격언처럼 사소한 일을 문제 삼는 것은 신학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소치다.

사소한 것에 과민 반응하고 다투는 사람은 아직 신학적 훈련이 덜 된 사람이다. 신학에 정통할수록 협상 가능하고 견딜 만한 문제가 무엇이며 힘을 다해 싸워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방해요소 6. 시대의 비합리적인 정신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반()지성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말은 결코 반학문적, 반기술적, 반과학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반지성적이라는 말은 지성에 반()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합리성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막강하다.

우리는 감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그 점이 드러난다. 신학교 학생들은 시험 답안을 작성할 때 계속해서 “......은 잘못된 것 같다.” 혹은 “......은 옳다고 느껴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면 나는 “......같다.” “......느껴진다.” 등의 표현을 빼고 “......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은 넣어준다. 느낌과 생각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최우선 순위는 지성이다. 마음 역시 최우선 순위에 있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어떻게 두 가지가 동시에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우선된다는 말은 한 가지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동시에 동일한 관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의 다른 우선순위란 두 가지의 다른 문제에 관한 것이다.

중요성이라는 우선순위에서는 마음이 먼저다. 머릿속에 올바른 교리가 있다 해도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잃게 된다. 나의 신학이 흠잡을 데 없이 올바른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순서적 측면에서 지성이 우선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점점 더 커져간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다.

성경은 글자로 쓰였고 지성을 사용하여 이해해야 하는 개념들을 전달해준다.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 목적은 그것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고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 연구를 소홀히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방해요소 7. 세속의 유혹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천은 세속 현자(Worldly Wiseman)의 말을 듣고 유혹에 빠져 천국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 딴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이 첫 번째 시험이었다. 세속 현자, 그의 이름이 비록 거짓 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가 가르치는 것은 거짓 신학이었다.

우리는 쾌락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등에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강한 힘은 오늘날의 문화가 선호하는 진리에 대한 시각을 받아들이라는 유혹이다.

 

앨런 블룸(Allan Bloom)<미국 지성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이라는 책에서 현대 교육의 보편적인 상대주의 수용이 인식론의 주된 경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지성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상대주의는 결국 비합리적이다.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결코 타당하지 않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그 자체가 상대적이며 진리로서의 가치가 없다.

 

일반 교육의 사고방식, 그 반지성적인 사고방식은 복음주의에 스며들어와 복음주의를 거의 점령할 지경에 이르렀다. 복음주의자들은 모순된 두 가지의 생각을 지지하고, 극단적으로 일관성 없고 상호 배타적인 신학을 정신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상대주의나 주관주의를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종교적 허울을 쓴 철학이 기독교의 세례를 거치고 영적인 옷을 입으며 받아들여진 것이다.

 

소위 성령의 인도하심이 수많은 인식론적 죄악을 정당화시켰다.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때문에 성경에서 분명히 금한 것을 행한다. 그러한 주관적인 인도하심은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가정 하에 말씀을 파기할 수도 있다. 비합리적 모순에 대한 지지는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는 더 높은 논리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

만일 성경에 대해 일관성 있고, 논리적이며, 변함없고, 합리적인 이해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즉시 아리스토텔레스적 유물론을 숭상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합리주의 철학이 종종 기독교 신앙과 적대 관계에 놓이기 때문에 합리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버리고 달아나야 한다. 기독교에는 이성의 노력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이성 자체를 타협 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합리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합리적이다.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진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더 합리적이다. 결코 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방해요소 8. 말씀 연구를 경건의 시간으로 대체함

 

개인 경건 시간에 성경을 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으로 만족하고 진지한 성경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하지만 정말로 경건의 시간에 성경 읽기진지한 성경 연구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개인 예배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은 실험적인 책이다. 번역본은 신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일반인을 위해 쓰였다. 이러한 의도가 적중한다면 다른 위대한 기독교 서적의 또 다른 번역본들도 나올 만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게르만 신학>(Theologia Germanica),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agination of Christ), <완전의 척도>(The Scale of Perfection), 노리지의 줄리안 여사(Jullan of Norwich)가 쓴 <요한계시록>(Revelations) 등이 임 시중에 나와 있다. 어떤 책은 그리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지만 그 책들 모두 크나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은 모두 교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경건에 관한 것이다.

 

지금은 평신도, 즉 비전문인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그들이 지식을 얻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진다. 굳이 책의 종류를 두 부류로 나누지 않겠다. 나의 경우, 개인 예배 시간에는 경건 서적보다 교리적인 책들이 더 도움을 준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거나 무릎을 꿇고 경건 서적을 읽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손에 펜을 들고 까다로운 신학을 파고들 때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나는 체험을 할 것이다.

 

매일의 경건 시간을 위한 유용한 도구들은 많다. 매일 15분에서 30분 정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루 15분 성경을 읽는 것은 아예 읽지 않는 것보다 분명히 낫다.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하루 15분에서 30분 정도 성경을 읽는 시간을 지킴으로써 말씀의 깊이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처럼 짧은 시간에는 아무런 훈련도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보다 더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경건 시간의 말씀 읽기는 진지한 성경 공부를 훌륭하게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지한 성경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 책의 각장 끝에 나오는 참조 성구들과 그 성경 본문은 그러한 성경 공부의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방해요소 9. 게으름

 

칼 바르트는 타락한 인류의 근본적인 세 가지 죄는 교만, 부정직, 게으름이라고 말했다. 바르트가 그와 같이 구분지은 것이 올바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 세 가지를 심각한 죄로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게으름으로 향하는 강한 성향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거듭났다고 그 즉시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만과 부정직에서 즉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나태함에서도 즉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할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의 책임과 임무를 면제시키지는 않는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2-13).

여기서 일이란 공로를 쌓거나 칭의를 얻게 해주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칭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며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애써 공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내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신학의 오류가 죄라고 말하면 놀란다. 학생들은 실수에 대해서는 도덕적 죄과를 묻지 못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이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께서 그의 일을 행하시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일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일을 면밀하게 연구해야 하는 책임을 우리가 소홀히 한 것이다.

 

방해요소 10. 불순종

 

불순종을 우리의 성장을 막는 개별적 원인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불순종은 이미 밝힌 다른 모든 장애 요인에 하나같이 내포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불순종을 다른 모든 요인에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요인으로 말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학 연구를 소홀히 하는 이유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긍정적인 측면에서 신학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겠다. 신학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시급하다.

 

신학은 영혼의 양식이다

 

사람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붙으려면 먼저 그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관한 지식으로 채워져야 한다. 생각 속에 자리 잡지 않은 것은 결코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없다. 영혼을 꿰뚫지 않고 머리로만 신학을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혼을 꿰뚫을 수는 없다.

교리를 지적으로 깨닫는 일은 영적 성장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필요조건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그것 없이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산소는 불을 붙이는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산소만으로 불이 붙은 것은 아니다. 만일 산소가 저절로 불을 일으킨다면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와 같이 산소가 불을 붙이는 필요조건이되 충분조건은 아닌 것처럼, 교리는 우리 마음의 불을 밝히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은혜롭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교리를 안다 해도,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교리라 할지라도 우리는 냉랭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라고 명하셨다

 

신학적 지식을 추구해야 할 두 번째 긍정적인 이유는 신학의 연구 대상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리적 깨달음에서 진보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고전 13:11)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적 이해라는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전 14:20).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자라가기 위함이다. 성숙한 지혜는 성숙한 삶의 기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은 큰 기쁨이자 특권이다. 그것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특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우리의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까지 자라가라고 명하신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쉐마(Shema)를 생각해보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하다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6:4-9).

 

이 성스러운 계명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그분의 계시를 습득해야 한다는 엄숙한 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부주의할 일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정동하려면 신학 연구에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

 

이제 다시 한 번 올바른 생활 없이 올바른 신학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올바른 신학 없이는 올바른 생활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신학을 추상적인 학문으로 여기면 안 된다. 그것은 삶과 죽음, 심지어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다. 따라서 이 책은 신학적 조망 위에서 그러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찰하는 여행의 안내서로 쓰였다.



[기독교의 핵심진리 102가지, 서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