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mation Theology/ㅡCalvin Studies

기독교강요 서론(Introduction) - 성서서원 (pdf)

Bavinck Byeon 2017. 1. 23. 01:28

기독교강요 서론(Introduction)


성서서원


   새롭게 영역(英譯)된 이 기독교강요는 수 세대에 걸쳐 인류의 신앙과 행동 양태를 형성하면서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학구적인 기독교인들의 도서 목록에 4세기 동안이나 줄곧 자리를 차지한 신학 서적이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보다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책의 제목은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에 대한 모호한 개념들이 널리 화자되고 있다. 본서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대한 문헌들이 때로는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이 책은 기독교를 거칠고 준엄하며 편협하게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진리의 독보적 해석이며 복음주의적 신앙의 보루로 격찬을 받고 옹호를 받았다. 평가를 가장 받지 못할 때에도, 실제 교회들의 삶과 각 개인들의 습관에 대한 이 책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정부 치하에서 예배를 금지당한 기독교인들에게 본서는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역사의 전화기에서 사회의 기초들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츠러드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이 고전에 새로운 경의를 표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탐구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칼빈의 방법이나 용어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법과 용어로 훈련받는 현대에도, 이 명작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심층 연구를 요구하며, 기독교 교리와 사회적 직무 분야에 대해서 사고하도록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I


   기독교강요(Th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는 성경적인 기독교의 부활이라는 기치를 내건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한 젊은이의 생생한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칼빈이 거친 단계들이나 이른바 그의 "돌발적인 회심" 날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칼빈의 확신은 투쟁과 고뇌의 산물이다. 대성당이 있는 교구 도시인 노용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후 그는 일찍이 파리 대학에 진학하였고 후에는 오를레앙(Orlians)과 부르그(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에서 떠나 고전 문학에로 관심을 돌렸다. 이렇게 활동하던 기간(1523-1533) 중에 그는 성경학, 복음적 열정, 박해 및 순교 등의 형태로 당시 프랑스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당대의 종교적 위기를 점차 깨닫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칼빈은 콥이 1533년 11월 1일에 연설한 학장 연설과 어떤 면에서는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 연설은 명확한 개신교적 발언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가렛 드 앙골름(Marguerite d’ Angouleme)이 이끄는 당시 성경적 휴머니즘을 반영한다. 이 여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고, 영향력을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고령이었던 노학자 르페브러(Jacques lefevre of Etaples)였다. 루터와의 친분도 어느 정도 있었음이 이 연설문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 원리들을 신봉하였던 사람이 작성하였다는 내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문의 대담성은 당국자들을 경악케 하는 것이었고, 칼빈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신하였고, 그 다음해 거의 일년 내내 숨어서 지냈다. 네라끄에 있는 르페브러를 방문한 후 봄에 그는 노용(Noyon)으로 가서 새로운 결정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 곳에서 1534년 3월 4일, 그는 어린 시절에 교육받아 왔던 성직도 포기하였고 이에 따라 미개혁 교회 및 성직자와의 관계도 단절하였다. 비개신교 성경 운동의 은퇴 지도자인 르페브러와의 대화가 그로 하여금 개신교 대열에 확실히 서게 만든 "회심"의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후로 그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결코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 해 말에 그는 격렬한 두 개의 서문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조카 올리버땅(Pierre Robert Olivetan)이 삐에몽의 발도파(Waldenses of Piedmont)를 위하여 마련한 프랑스어 성경의 신약과 구약의 서두에 실을 예정이었다. 이 책이 1535년 6월에 출간되었을 때에, 칼빈은 바젤에 체류하였고 그의 『Instie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원고는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저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직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던 1543년일 수도 있다. 뒤 틸레트(Du Tillet)가(家)가 앙골름의 끌래(Claix)에서 그에게 "조용한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최소로 줄여 말한다 해도 그가 그곳에서 대할 수 있었던 방대한 장서들이 훗날 위의 책에 반영된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이 새로운 운동을 하는 저명한 지도자들에게는 점점 더 위험하게 되어 갔다. 이 때문에, 그리고 그가 어느 곳을 가든지 그는 질문자들로 에워싸였기 때문에, 칼빈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를 해외에서 찾기로 작정하였다. 1535년 1월 초엽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바젤로 향하였다. 당시 많은 개신교인들이 점차 심해져가는 박해를 피해 도주하고 있었다. 국왕이었던 프란시스 1세는 1534년 10월 18일의 플래카드 사건에 대해 격분하였다. 이 날 밤에 미사에 대한 통렬한 공격 내용이 담긴 벽보들이 공공건물에 나붙었고 심지어는 왕의 침실에까지 뿌려졌던 것이다. 수많은 혐오자들이 투옥되었고 화재가 연일 발생하였다.
   칼빈은 주로 1588년에 발간된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어려웠던 시기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다. 그는 연구를 위하여 "조용한 은신처"를 찾으려고 고향을 떠난 후에 그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화재 사건들과 이에 대한 왜곡 설명을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를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칼빈이 "바젤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는" 동안에, 박해로 야기된 격렬한 반(反)프랑스 움직임을 완화시키려고 프랑스 궁중에서 나온 허위 성명서들이 독일권에서 널리 퍼지고 있었다. 칼빈의 말대로 이 성명서들은 고난 받는 자들을 "재세례파 교도들과 선동적인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선언서는 파리의 감독이며 왕을 대신하여 독일 정부와 신학자들과 교섭하였던 협상자의 형제 기욤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2월초에 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칼빈은 그러한 선언서들이 장차 있을 유혈 사태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확신하고, 침묵을 지킨다면 자기는 비겁장이요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신실하고 '거룩한 순교자들'로 그가 간주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부당하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그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구들이었고, 그 가운데 특히 파리의 상인이며 삐에몽 출신의 왈도파 교도였던 에띠엔느 드 라 포즈(Etienne de la Forge)는 1535년 2월 15일에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말대로는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죽음을 당한 내 형제들이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외국 민족들을 감동시킴으로써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본서가 형성되었다. 그의 저술에 관한 그 이전의 의도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는 이제 그것의 출판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1535년 1월부터 8월까지 본서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중대 사건들을 계속해서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출판 활동을 금지하려는 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1월말에는 박해가 극에 달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왕의 종교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노(老) 추기경 뒤쁘라(Duprat)의 죽음으로 박해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루터파 교회와의 협상이 프랑스 궁정에 의해 2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결렬되었다가 당시에 재개되었다. 교회 개혁에 대한 협의차 파리를 방문해 달라는 긴급 초청장이 멜랑히톤(Melanchton)과 부처(Bucer)에게 전달되었고, 이 계획은 칼빈이 『Institutio』 원고를 완성한 지 며칠 후인 8월 28일까지는 계속 진행되었다. 왕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상황이 우호적으로 변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기간 중에 칼빈은 유럽에서의 개신교 주장이 뮌스터(Munster)에 거점을 둔 열정적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인해 평판이 나빠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재세례파 지지자들은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였다가 1535년 6월말에 무참하게 궤멸 당하였다. 칼빈은 그의 책이 1535년 프랑크푸르트 가을 전시회까지는 출간되기를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논문 앞에 오는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The Prefatory to Francis I)에 그의 이름과 함께 날짜를 써넣은 1535년 8월 23일에 이르러서야 그의 원고는 탈고되었다. 바젤의 인쇄업자인 플랫터(Thomas Platter)와 라지우스(Balthasar Lasius)는 편집을 함에 있어서 오포린(Jean Oporin)의 협력을 받아 지체없이 작업을 진행하여 1536년 3월에 이 논문을 발행하였다. 이 초판의 라틴어 제목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기독교강요, 구원론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빠짐없이 다룬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며, 최신판이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이 책은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왕에게 헌정되고 있다. 저자, 노용의 요한 칼빈, 바젤. MD XXXVI.


II


   제목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모두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Institutio 자체는 "훈련, 교훈"(instruction) 또는 "교육"(education)이라는 의미로 낯이 익은 것이다. 이 저서는 기독교 교리 개요로서 그리고 저자의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박해자 왕에게 바치는 고백으로써 계획되었다. 왕에게 드리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탄원서인 헌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본서 자체는 그것이 기록되었을 때의 역사적 위기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종교적 심성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가 장엄하게 표현되고 명료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칼빈 시대의 문제들 및 개혁 교회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깊이 연관된다. 칼빈이 프란시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를 왕의 죽음 이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Institutio 후기 판들에 그대로 실은 것은 그의 특징적 방법이다. 당시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쓴 것이기는 하지만, 강요는 박해당하는 성경적 신앙 소유자들을 항구적으로 유력하게 변호하는 것이다.
   1536년판 논문의 본문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장은 기독교 교육 역사에서 잘 알려진 주제들에 관한 것이며, 루터의 교리 문답책(Luther's Catechisms)에 수록된 주제들, 즉 율법, 신조, 주님의 기도(Lord's Prayer) 그리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Lord's Supper>) 등을 다룬다. 제5장은 중세 교회에서 매우 중시되던 5가지 성례전(견진 성사, 고해 성사, 병자 성사, 신품 성사, 혼인 성사) 인정에 대한 논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6장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한 도전적인 논의이며, 정치적 · 사회적 교훈 요소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 책은(간단한 색인을 포함해서) 크기가 6⅛×4인치의 8절판이며 페이지 수는 520페이지이고 길이는 신약성경의 에베소서 끝까지에 해당한다. 저자는 그것을 또다시 확장하여 1559년에는 최종 형태에 도달하였는데, 이때의 분량은 대략 구약성경과 공간 복음서를 합친 것과 동일하였다. 본서 출간 6개월 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출판한지 1년이 못되어 그 판은 품절되었고 개정판을 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 이 일에 착수하였지만, 칼빈이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바젤에 체류해 있는 동안이었던 1538년에 이르러서였다. 인쇄업자가 바뀐 것을 포함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연된 후에, 개정판은 웬델린 리헬(Wendelin Rihel)에 의해 1539년 8월에 슈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발간되었다.
   책 제목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개정판을 가능한 한 초판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 번역서에서는) 책 제목 앞에 나오는 "마침내 진정으로 제목에 합당한"이란 이상한 문구는 초판의 상세한 제목의 가정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확실히 신판의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다. 칼빈은 그 책에서 구체화시킨 변화들을 스스로 축하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6장이 아니라 7장으로 되어 있지만 분량은 비슷하다. 이 저서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어거스틴(Augustine), 오리겐(Origen) 및 기타 교부들 그리고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키케로(Cicero), 세네카(Seneca) 및 최근의 몇몇 학문적인 저술 등의 인용문들을 다수 포함시킴으로써 상당히 증대되었다. 성경 인용도 또한 상당히 증가되었다. 추가된 장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및 기독교인의 생활 등과 같이 칼빈의 사고의 구조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주제들을 다루는 장들이 몇 개 있다. 1539년 8월 1일자로 독자에게 보내는 간략한 편지에서 저자는 초판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인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며, 개정판을 내는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신학 지망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데 사용될 하나의 교과서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이 책의 형태도 책상용으로 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 계수에 오차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그 책은 총 346페이지이며, 크기는 13×8인치이고, 학생이 메모할 수 있는 넓은 여백이 있다. 프랑스에도 보급된 개정판의 일부에는 칼빈의 이름을 "Alcuinus"로 읽도록 철자 순서가 바뀌어져 있다.
   초판 출간 직후에 그것의 프랑스어 역이 칼빈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란시스 다니엘(Francis Daniel)에게 보내는 1536년 10월 13일자 편지에서 칼빈은 제네바 정착과 그 이후의 와병에 대해 전하면서 그는 그의 "소책자"(libellus)의 프랑스어 판 준비에 계속 몰두하였다고 말한다. 그 "소책자"가 『강요』(Institutio)였다는 가정은 개연성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칼빈이 그 논문을 가리켜 libellus라고 하였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539년판 서문에서 1536년판에 대해 사용한 말은 opus(저작)이기 때문이다. 로잔 논쟁(Disputation of Lausanne) 직후에 다니엘에게 편지를 쓸 무렵에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믿음의 교육과 고백) 준비에 바빴던 것이 확실하다. 이것의 프랑스어 판이 대체로 라틴어 원판을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라틴어 판은 실제로 1538년판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강요』의 핵심 논쟁들을 약술한 것으로서 간략하고 단호한 문체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소책자"이지만, 그것의 라틴어 저작과 프랑스어 번역판 출판에는 칼빈이 교회 재조직이라는 새로운 일을 하면서 수주일 동안에 걸쳐 낼 수 있었던 시간들이 모두 소모되었다. 그해 가을에 칼빈은 당면했던 긴급한 일 때문에 『강요』 분량의 저작을 번역할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1536년 또는 1537년 프랑스어 판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프랑스어 판은 유명한 1541년 판이며, 이는 칼빈이 1539년 라틴어 판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III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장 지라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고, 822페이지, 7½×4½인치 판형에, 약간 거치른 인쇄의 소형 콤팩트판 책이다. 이 책은 휴대가 간편하며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평신도 독자 예배 의식의 집행을 허락받은 평신도들을 위해 계획되었다. 프랑스에서 발행 허가의 희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발행 부수가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프랑스어권 스위스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그 책의 서두의 개요에는 학술적 용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목적은 "구원의 교리에 관한 교육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도 장(章)의 순서에 한 가지 변화가 있을 뿐, 1539년 판에 프랑스 옷을 입힌 것뿐이다. 칼빈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프랑스 산문의 발전을 연구한 학도들에게서도 그것의 문체는 극찬을 받았다. 또한 그것은 지속적이고 중대한 사상의 표현 매개체로서 프랑스어가 최초로 사용된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어의 특색을 그렇게 창조적으로 표현한 책이 소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라틴어로 생각하던 저자의 번역이라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 보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고, 다른 수단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1542년 7월과 1544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그 책들을 파리 노틀담 사원 앞에 쌓아 놓고 불태운 사건이다.
   초판의 모든 변증적 요소들은 저작이 방대해지면서도 그대로 존속된 것은 물론이지만, 새로운 서문들과 추가된 자료들은 신학도들과 혹은 평신도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대한 교육이 점차 저자가 의도하는 목표로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1543년의 라틴어 제3판(슈트라스부르그에서 리헬에 의해 두 번째 인쇄된 판)에는 네 장이 새로 추가 삽입되었고, 그러므로 장(章) 수는 총 21장이 되었다. 이 판은 1545년에 재발행되었고, 그 해에 증보판이 제네바의 지라드 인쇄소(Girad's Press)에서 간행되었다. 또한 지라드에 의해 출간된 1550년의 라틴어 판은 1543년 라틴어 판과 단지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1550년 판에서 소개된 주목할 만한 개선점은 번호를 붙여서 절을 구분한 점이다. 21장에서 총 1217개의 구분된 절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색인이 추가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다루었던 주제들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저자가 인용한 성경구절들과 저작들에 대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출판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 1550년에 파리에서 제네바로 왔으며, 거기서 그는 프랑스에서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성경 발행과 종교서적 발간이라는 그의 일생의 사업을 제네바의 목회자들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재개하였다. 이 사람이 곧 로베르 에스띠엔느 혹은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or Robertus Stephanus)이다. 그는 새로운 학문과 종교개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학자의 출판업자 가문인 대(大) 에스띠엔느 가문의 유명 인물이었다. 1553년 2월에 그는 칼빈이 그때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훌륭한 『강요』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13½×8¾인치의 2절판 크기였고, 아름다운 활자체로 나무랄 데 없이 거의 완벽하게 인쇄되었다. 이것은 왕에게 드리는 헌사와 색인을 제외하고 441쪽이었다. 그러나 내용면에는 1550년 판에서 더 진전된 것이 없다. 아담과 장 리버리(Adam and Jean Rivery) 형제가 이 책의 본문은 변화 없이 색인만 증보하여 8절 크기의 소책자로 1554년에 제네바에서 재발행하였다.
   현대의 독자들 중에는 초판에 더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번역서의 대본(臺本)으로 사용된 1559년의 증보판보다는 1539년 판이나 그것의 1541년 프랑스어 판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초기 단계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그 책이 덜 지루하고 덜 논쟁 대상이 되며 충분히 이해하기 쉽고 읽기에 더 편하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반박한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말할 나위 없이 초기 판들을 재발행하는 일은 적절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판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를 무시하고,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이상에 맞도록 그의 저서를 개작(改作)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노력의 결실을 말살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59년의 라틴어 판은 칼빈의 가장 명백한 권위 있는 인정서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항상 주장되어야 한다. 이 책 서두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그는 그의 저서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그 이전의 개정판들에 대해 언급하고, "내가 기울인 노력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 저서가 현재와 같은 순서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는 4일열(四日热, a quartan fever)이라는 병으로 열을 앓으면서 개정작업을 하는 동안에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이 일을 수행하도록" 만든 열정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 가운데 표현된 성취감이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여태까지는 존중되었고, 그 결과 이것이 라틴어 판에 대한 결정판이 되었고 1863년까지는 그것만이 전적으로 재발행되었으며 번역판과 요약판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 결정판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칼빈 신학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점차적으로 증대되었고, 칼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신학 저술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연구의 초점이 우선적으로 『강요』에 향하게 된 것은 당연하며, 현대 연구에 있어서 그 저서로부터 인용하는 경우에는 1559년 판을 인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이다. 그 책의 절(莭)을 표시해주고 인용을 용이하게 해주는 번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처럼)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거의 공용어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다. 이 라틴어 판은 그 이전의 판본들보다도 분량 면에서 80% 정도가 더 많다. 이 책이 모든 나라에서 아주 오랫동안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학문적 교류를 위해 그 이전 판들로 돌아갈 실제적 가능성은 이제 전혀 없다.
   이 책은 제네바에서 인쇄되었고 로베르 에스띠엔느 출판사에서 1559년 8월 16일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인용된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 칼빈이 서명한 날짜는 8월 1일이다. 유명한 출판업자요 생산적인 학자였던 에스띠엔느는 3주일 후에 죽었고, 따라서 최종 형태의 『강요』는 그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그 책의 표제는 다음과 같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i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insti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now first arranged in four books and divided by definite headings in a very convenient way: also enlarged by so much added matter that it can almost be regareded as a new work.

   다음에는 저자의 이름이, 그 아래에는 발행인의 이름이 유명한 올리브 가지 마크와 함께 나오고 맨밑에는 GENEVAE / M. D. LIX가 있다.


IV


   칼빈은 라틴어 판 강요의 개정판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제네바의 장 끄레스뺑(Jean Crespin) 출판사에서 증보된 프랑스어 번역판이 1560년에 발행되었다. 칼빈은 이 번역판을 자신이 직접 준비하거나 가까이에서 관리 감독하였다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강요』의 라틴어 판과 프랑스어 판은 똑같이 그 수요가 모두 광범위하였고 심지어 칼빈이 죽기(1564) 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재판되었다. 1561년에는 라틴어 판이 두 가지로 새롭게 인쇄되었는데, 하나는 슈트라스부르그의 칼빈 전담 출판업자인 리헬이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2절판 15×12인치 책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제네바의 앙트완느 레불 또는 안토니우스 레불리우스(Autoine Reboul or Antonius Rebulius)가 만들어낸 8절판 크기로 980쪽 분량의 책이다. 레불은 그가 권말에 장, 절을 책 인용과 함께 예시하면서 알파벳순으로 주제 색인을 삽입시킨 것은 독자들 다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59쪽 분량(쪽 번호 없이)의 다소 방대한 이 색인은 후에도 라틴어 판 및 프랑스어 판과 함께 인쇄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아래에 언급된 말로라(marlorat)라는 두 색인과 함께 인쇄되기도 했다. 레불이 펴낸 것은 읽기 쉬운 작은 활자로 만들어졌고 난외에 참조 성구가 적절하게 되어 있다. 후대의 라틴어 판들 가운데 두 개가 편집상의 문제로 특별히 중요하다. 이것은 라이덴(Lieden)의 유명한 출판업자인 엘제비르(Elzevir) 가문이 1654년에 출판한 유명한 2절판 『강요』와 1667년에 암스테르담의 쉽퍼(J. J. Schipper)가 발행한 「Opera Calvini」의 제9권을 구성하고 있는 강요이다.
   1560년 프랑스어 판은 1561년에 제네바에서 두 차례 재판되었다. 1562년에는 이 판이 4회 발행되었는데 제네바와 까엔(Caen)에서 각각 1회씩 인쇄되었고, 장소와 발행인 표시가 없는 두 가지 판본이 발행되었다. 1563년에는 리용(Lyons)에서, 1564년에는 제네바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1562년에 제네바의 출판업자 쟈크 부르죠아가 발행한 8절판은 아귀스뗑 말로라가 만든 두 개의 색인을 하나로 합한 최초의 『강요』였다. 말로라는 학자적인 성직자이며 소수의 책을 낸 신학저작자로서 같은 해에 루엥(Rouen)에서 박해자들의 손에 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 색인 중 첫 번째 것은 강요에서 다룬 주요 문제들의 색인이며, 다른 하나는 강요에서 인용되거나 언급된 성구 색인이다. 말로라는 흥미 있는 서문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이전 판본들의 참조 성구가 몹시 부정확함을 발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칼빈이 오로지 확인 문구만을 사용하는 곳에서도 성경 구절을 완전히 제시한다. 그 유용한 색인을 단 라틴어 판은 그 후의 라틴어 판 『강요』와 함께 간행되었다. 예를 들면, 제네바의 프란시스 뻬렝(Francis Perrin)이 1568년에 펴낸 강요와 이후의 수많은 판본들, 즉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판들이 그것들을 사용하였다.
   프랑스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1536년 판은 1540년에 부르고스(Burgos)의 프란치스코 엔지나스(Francisco Enzinas)에 의해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 같다. 엔지나스는 멜란히톤(Melanchton)의 친구이며, 크랜머(Cranmer)의 보호를 받고, 칼빈의 통신원이었고 유명한 신약 학자요 번역가다.ª¹⁴⁾ 만일 최초의 스페인어 판이 칼빈 자신이 번역한 프랑스어 판보다 실제로 앞선 것이라면, 최초의 이탈리어 판은 더 늦은 프랑스어 판에 의거하였다. 이탈리아 청년 시인이며 종교적 이유로 제네바에 피신한 파스깔리(Giulio Cesare Pascali)가 그곳에서 그의 이탈리어 번역판을 만들어 낸 것은 1557년이었다. 파스깔리는 프랑스어 판을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1551년에 개정되고 1553년과 1554년에 재판된 것이었다. 그것은 제네바의 이탈리아인 피난자 교회의 가장 유명한 일원이며 비꼬(Vico)의 후작(侯爵)인 갈레아조 까라치올리에게 헌정되었는데, 칼빈이 일년 전에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이 사람에게 헌정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간행된 수많은 번역판들은 완성된 『강요』를 대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1560년 12월 5일에 네덜란드어 판이 엠덴(Emden)과 도르트(Dort)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는데, 번역자는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I. D."라고 밝히고 있다. 이 머리글자는 요한네스 뒤르키누스(1592년 죽음)를 나타내는데, 그는 상당히 저명한 목사요 저술가였으며, 그 당시에는 엠덴에 체류하였다. 1572년에는 최초의 독일어 판이 하이델베르그에서 발간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신학부 교수들이 준비한 것이며, 해석적 개요가 첨부되어 있다. 이 번역판이 158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그리고 1597년에는 하나우(Hanau)에서 재판되었다. 같은 해에 스페인어 번역판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스페인계 피난자인 치프리아노 드 발레라(Cipriano de Valera)의 작품이었다. 그는 제네바 체류 이후에 영국에서 수년간을 보냈으며 캠브리지에서 석사(master) 학위를 받았다. 1599년에 죽은 지리크 슈트렉의 체코어 판은 일부분만 발행되어 남아 있는데, 그것은 1617년에 제1권과 제2권이 발행된 것이다. 헝가리어 번역판은 헝가리 개혁교회의 저명한 목사요 학자이며 시인인 알버트 몰나르(Albert Molnar, 1634년에 죽음)에 의해 1624년에 하나우에서 발행되었다. 아랍어 판이 취리히의 동양학자 존 헨리 핫팅거(1667년에 죽음)에 의해 출판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입증된 적은 없다.
   톨룩(A. Tholuck, 라틴어, 1834, 1846, 1872), 바움가르트너(1560년 프랑스어 판, 1888), 시주(A. Sizoo,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한 네덜란드어 번역판, 1931, 1949) 등에 의해 만들어진 『강요』 판본들은 다만 참고서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번역한 베버(O. Weber)의 독일어 판(단행본, 1955)과 1560년 불어 판을 개작(改作)한 까디에르(J. Cadier)의 현대어 판(4권, 1955-1958)에는 분석적 표제와 분류된 색인이 제공되어 있다. 마사키 나카야마(Masaki Nakayama)가 라틴어 판을 번역한 일본어 판이 1943년에 동경에서 출판되었고 1949년에 다시 인쇄되었다.


V


   본서의 독자들은 최초의 영어 판 강요(Institutes)보다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1559년 판 이전의 라틴어 판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보급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생활을 취급한 장(章)들, 즉 강요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제3권 6장-10장만이 영어로 번역되었을 뿐이다. 후에 완역판이 검은 활자의 2절판 크기인 멋진 책으로 나왔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The Institution of Christian Religion, wryttin in Latine by maister Jhon Calvin, and translated into Enhlysh according to the authors last edition. Seen and allowed according to the order appointed in the Quenes Maiesties instructions.

   청동 뱀이 휘어감은 나무 십자가를 악수한 손이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한 인쇄업자의 상징, "주후 1561년에 레놀드 울프와 리차드 해리슨(Richarde Harison)이 런던에서 간기(刊記)함"이라는 판권장(版權張)이 나온다.
   그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발행장소는 "Paules Churcheyard"이며, 발행일은 "1561년 5월 6일"이라고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번역판은 라틴어 판이 제네바의 스테파누스(Stephanus)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떠난 지 21개월이 채 못되어 런던에서 출간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발행인들은 표제 페이지 후면에 책이 늦게 출간된 이유에 대한 사과 내용의 문구를 눈에 잘 띄지 않게 삽입하였다. 번역 작업을 존 도우즈(John Dawes)에게 맡겼는데, 그는 "12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 원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발행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완전히 다시 번역하도록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문 마지막에는 머리글자 "T. N."이 인쇄되었고, 그 다음 여섯 페이지에는 각 장 표제 목록과 간단힌 색인이 있다. 1562년의 제2판에서 역자는 짧은 서문을 삽입하고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덧붙였다. 개정판인 제3판에서만은 책 표제 페이지에 "Thomas Norton"이란 이름을 머리글자만 쓰지 않고 철자를 전부 쓰고 있다.
   토마스 노턴(Thomas Norton, 1532-1584)은 그의 강요 번역본이 출판되었을 때 약 29세였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노턴과 그의 친구 법학도인 토마스 새크빌(Thomas Sackville)의 합작품인 The Tragedy of Gorboduc이 1561년 1월 5일 밤에 최초로 상연되었고, 2주일 후에는 명령에 따라 여왕 앞에서 공연되었다. 영광스럽고 매우 감동적인 이 무운시 극은 현대  영국 비극의 발전의 기원이며 노턴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노턴이 라틴어와 영어로 지은 초기의 시들과,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시편들을 시로 개작(改作)한 작품들도 종교 서적의 여러 번역서들과 교회 문제를 논쟁적으로 취급한 몇 개 산문들과 함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친숙하였다. 서머셋 경(Duke of Somerset)이 칼빈과 편지를 교환하던 때에 경에게 있어서 노턴은 매우 조숙한 비서였다. 서머셋 경이 죽은 후, 칼빈이 그 자녀들에게 안부 편지를 썼을 때, 답신을 대신한 사람이 노턴이었다. 1555년에 그는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딸과 결혼하였고 후에는 대주교가 남긴 중요한 원고들을 공표하였다. 확실한 칼빈주의자인 그는 또한 청교도들의 교회개혁조치 지지자였고, 한때는 감독들을 비판해서 투옥되기도 했다. 노턴은 1558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그 후 의회 논쟁과 위원회 활동으로 자주 명성을 떨쳤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재판, 특히 1569년의 대반란에 연루된 자들의 재판에 참여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거칠고 비난받을 만한 열정을 나타내 보였다. 학자적이고 유능하며 다재다능하였지만, 노턴은 문학에 있어서나 직무에 있어서나 주요 역할을 맡은 적은 결코 없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칼빈이 강요의 훌륭한 영어 번역자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의 것이었다.
   1574년에 노턴 번역 제3판에서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는가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본래의 서문을 개정하고 증보하였다. 노턴은 유명한 두 출판업자로부터 여왕을 위해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에드워드 휘트처치(Edward Whitchurch)인데, 그는 리차드 그라프톤(Richard Grafton)과 함께 1539년에 그레이트 바이블(Great Bible)을 발행하였고 1549년에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출판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레지날드 또는 레이놀드 울프인데, 그는 슈트라스부르그 태생으로 영문 서적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번역일을 마무리한 곳은 바로 그레이프라이서스(Greyfriars)에 있는 휘트처치의 집이었다. 노턴은 휘트처치의 부인이 크랜머(Cranmer)의 미망인 곧 노턴 자신의 아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휘트처치가 1561년 후반에 죽은 후 쓴 편지에서 노턴은 자신을 가리켜 "노련한 열정의 복음 전도자", 즉 "내 생애에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친구"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비평적 조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특히 데이빗 화이트헤드의 이름을 말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는 그의 번역문의 모든 문장을 라틴어 본문과 하나하나 대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1555년 프랑크푸르트 투쟁에서 에드워드의 "기도서"(Prayer Book)를 지지한 당과 연관되어 망명한 자로서 전(前) 메리 여왕 당원이었다. (독학으로 획득하였지만) 공인된 학식을 소유한 저명한 목사였으며, 그는 아마그(Armagh) 교구의 감독직을 사양하였고, 캔터베리(Canterbury) 감독직도 거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5년에 헨리 베버리지(Henry Beveridge)는 "노턴이 그의 일을 대체로 아주 충실하게 해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어의 문체를 크게 손상시키면서까지 라틴어 형식을 '너무 세심하게' 유지하려 한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노턴 스스로가 칼빈의 저서가 "중세 스콜라학자들의 논쟁들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이 의미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영어의 표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칼빈의 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설명한다. 때로는 이 방법이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베버리지처럼 노턴이 "라틴어법식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노턴의 번역이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의 전형적이고 명료한 산문과 거리가 멀기는커녕, 어떤 권위 있는 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당시에 "대부분 성직자들과 번역자들의 작품"이었고 그 다음 세대의 저작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허세와 과장이 전혀 없었다. 제3판에서 노턴은 출판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오류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서 만족하였다. 그는 이 오류들이 "자신의 글씨가 난필이라는 점, 자신의 사본의 교정한 것들, 그리고 출판업자들만이 알고 있는 몇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2차 개정 때에 대략 300곳의 오류를 바로 잡았고, 그러므로 제3판에는 그러한 잘못들이 실제로 없다고 믿는다. 이 번역판에는 레불(A. Reboul)이 작성한 라틴어 색인의 번역판("Table of Matters Entreated of")이 당시 처음으로 첨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로라(Marlorat)가 작성한 두 개의 색인이 그의 서문 다음에 수록되었다. 이 1574년 개정판 발행 이후, 노턴의 책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1578, 1582, 1587, 1599, 1611, 그리고 1634년에 재발행되었다. 이 판본들, 특히 앞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판본은 어형 변화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1634년 판에서는 "Jhon Calvin"이 John Calvin"으로, "truthe"가 "truth"로, "glorie"가 "glory"로, "geuen"이 "given"으로 바뀌었고, 초판에서 사용된 약어(略語)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 작품을 현대어로 개정하려는 시도는 1762년의 글래스고우(Glasgow) 판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판본은 그 당시 유행하던 철자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식 표현이나 고어체 표현들을 아낌없이 고쳤다.


VI


   그 이후부터는 노턴 역본이 재판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 전(全)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번역본은 존 알렌(John Allen, 1771-1839)의 것이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translated from the Latin and collated with the author's last edition in french, London: J. Walker, 1813.

   알렌(Allen)은 핵크니(Hackney)에 있는 비국교회파 아카데미(Dissenting Academy)의 학장으로 역임한 평신도였다.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초기 저작으로서 "The Fathers, the Reformers, and the Public Formularies of England in Harmony with Calvin···(1811)"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고, 현대 유대교에 관한 논문(1816)이 있다. 알렌 번역본의 대부분은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한 것이고, 프랑스어 판을 참고해 개정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두 가지 판을 모두 참고하였다. 비록 그가 노턴의 번역판을 "매우 낡고 거칠고 모호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의 번역 원칙은 노턴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는 "직역과 의역의 중간 입장을 견지하였고, 라틴어와 영어의 각 관용어들이 허용하는 한 원본의 문체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탁월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실한 번역이며, 칼빈의 격렬한 문장들과 생생한 은유들이 잘 보존된 번역이고, 원문의 의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만한 오류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알렌의 번역판이 특히 미국에서 출간을 거듭하여 1936년까지 30회 재판되었다.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1909년 판에는 on the Literary History of Calvin's Institutes"라는 워필드의 귀중한 소논문이 첨가되었고, 1936년 판(칼빈의 초판 이래 400년이 된 시기)에는 토마스 피어스(T. C. Pears, Jr.)가 "An account of the American Editions"이라는 제목의 글을 첨가하였다. 알렌의 번역판은 미국 편집자들에 의해 약간씩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1841년에 조셉 패터슨 엥글스가 개정한 것이다.
   알렌 번역판의 독주 기간은 길지 않았다. 1845년에 다음 제목의 번역판이 나타나게 되었다.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A New Translation by Henry Beveridge.

   헨리 베버리지의 번역본은 칼빈 번역회(Calvin Translation Society) 후원으로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출판되었다. 베버리지(Beveridge, 1799-1863)는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후에 법률 교육을 받았으며, 저술을 그의 본업으로 삼았다. 그가 칼빈회 후원으로 번역한 것들 중에는 1844년에 3권 1세트로 발행된 칼빈의 "종교개혁에 관한 자취"라는 책이 있다. 후에 그는 다른 연구에 전념하여 "인도 역사의 이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강요 판은 3권으로 나왔고, 서론 부분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발간된 후대의 인쇄물들에서 누락된 항목들이 실려 있는데, 그 항목들을 누락시킨 것은 손실이 분명하다. 그중 하나는 칼빈회의 서기인 로버트 핏케언이 준비한 "Catalogue Raisonne of the Earlier Editions"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판본들 대부분을 도움이 되도록 서술한 것으로서, 상당 부분은 핏케언이 주의 깊게 검토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누락된 것도 있고 다른 곳에는 약간의 결함도 있어서 그가 만든 목록이 안전한 안내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목록에는 강요 요약판 3권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완역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초기 네덜란드어 판과 독일어 판에 대한 그의 정보도 결코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베버리지가 쓴 서론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동료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초기 판들의 표제 페이지를 정선하고 복사하여 수록해 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1536, 1539(Alcuin 변형판), 1545, 1559, 1561년 라틴어 판과 1545년 프랑스어 판, 1557년 이탈리어 판, 그리고 1597년 스페인어 판에서 발췌 수록한 것들이다. 마지막 두 가지 경우에는 원래 인쇄된 서문이 다시 복제되었다.
   베버리지가 노턴의 번역판을 낮게 평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아주 특이하지만, 그는 알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버리지 자신의 번역은 질이 고르지 못하다. 몇몇 부분에서는 그가 사용한 초기의 빅토리아 시대풍의 어휘가 알렌의 초기 작품의 어휘보다도 현재의 용법으로부터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자신이 노턴에 대해 "라틴어식 영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비판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구절도 있다. 오히려 그는 먼저 번역한 번역자들보다도 정확하지 못한 면도 있고, 약간씩 빠뜨린 부분들도 많고 분명히 잘못 번역된 부분도 약간 있다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훌륭히 번역했으며, 더 공들여 번역한 구절에서 베버리지는 칼빈의 수사학적 능력을 뚜렷이 의식하고 독자들에게 세련된 문장 표현으로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VII


   강요의 분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수많은 요약판들이 일찍부터 출간되었다. 이 요약판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본래의 강요처럼 라틴어로 발행되었고 그 후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출판되었다. 가장 초기의 요약판 중 하나는 영국의 칼빈주의 교리 순회 설교자로 인기 있는 에드먼드 버니(Edmund Bunney, 1540-1619)가 편찬한 것으로, 그 제목은 『Institution Christianae Religionis···Compendium』(London, 1576)이다. 그것은 에드워드 메이(Edward May)가 『The Institutions of Christian Religion···compendiously abridged by Edmund Bunnie, bachelor of divinity···』(London, 1580)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발췌집이 아니라 주로 버니의 말로 축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윌리암 델론(William Delaune, Laneus/Launeus/Lawne)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Epitome』(London, 1583)으로 대체되었다. 델론(1610년에 죽음)은 위그노파 망명자였고, 그의 책을 출판한 사람은 친구이며 종교가인 토마스 보트롤리어(Thomas Vautrollier, 1587에 죽음)였다. 그는 1576년에 영국 유일의 라틴어판 강요를 발행하였다. 『The Epitome』은 저자의 언어를 가능한 한 많이 간직하고 있는 요약판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요약판은 강요의 자료를 8절판 371쪽에 수록하고 있으며, 1559년 판의 배열을 가장 근접하고 균형 있게 따르고 있다. 칼빈이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를 알리고, 반박하는 곳에서, 그의 본문은 이론(異論)과 답변을 대화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페이지가 매겨 있지 않은 21쪽에는 강요의 논증 과정에 관한 "총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것은 괄호로 묶은 절과 소절의 정교한 구조로 나타난다. Epistola Nuncupatoria 또는 조폐국 국장인 리차드 마틴(Richard Martin)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델론은 그의 책을 가리켜 "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에서 가져온 꽃다발"이라고 말한다. 난외의 여백에는 세심하게 준비된 분석적인 주(註)를 달고 있다. 이 책에는 25페이지의 색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페더스톤(Christopher Fetherstone, Edinburgh, 1585)의 완역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사람이 훌륭하게 번역한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도 같은 해에 나왔다. '강요' 요약판의 발행은 궁핍한 학생이나 또는 읽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뜻하지 않는 행운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1650년에는 델론의 네덜란드어 판이 있었고 1837년에는 영어 번역판이 재판되었다.
   널리 반포된 또는 다른 라틴어 요약판은 뛰어난 개혁 신학자이며 낫소(Nassau)의 헤르본 아카데미(Academy of Herborn)의 성경학자인 존 피스카토르(John Piscator/Fischer, 1546-1625)가 요약한 것이다. 피스카토르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의 동료이자 계승자였고, 올레비아누스가 정리한 "요약판"(1586)을 수업에 활용하였다. 또한 그의 「Aphorismi doctrine Christianae maximam partem ex Institutione Calvini excerpti sive loci communes theologici, (Herborn, 1589)」는 학생들의 토론을 위해 편집된 것이며, 곧이어 그러한 요구에 의해 1615년까지 무려 8판이 나왔다. 그것의 제3판을 헨리 홀랜드(Henry Holland)가 「Aphorismes of Christian Religion in a verie compendious abridgment of M. J. Calvin's Institutions」라는 제목으로 영역하였고, 리차드 필드(Richard Field)가 1596년에 런던에서 발행하였다. 피스카토르의 부제(副題)를 따라 본문은 28개의 장으로 분류되었다. 이것은 주요 절 각각에는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경구(aphorisms, 警句)"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8개에서 34개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경구의 길이는 한 문장에서부터 몇 페이지에 이르기도 한다. 피스카토르는 논제(these)라는 말이 논쟁적인 불확실성을 시사하는데, 제시된 진술들은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논제(these)라는 용어보다는 aphorismi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강요 요약판이 그 후 곧 출간되었는데, 그것은 라이덴 월룬 대학(The Walloon College at Leiden)의 평의원인 다니엘 콜로니우스(Daniel Colonius)가 펴낸 「Analysis paraphrastica Institutionum theologicarum Johannis Calvini」(Leiden, 1628)이다. 콜로니우스는 엘제비르(Elzevir) 인쇄소 소장의 지위였고, 편집자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주 작은 활자로 아주 산뜻하게 인쇄된 12절판 크기의 책이 엘제비르에 의해 발간되었다(Leiden, 1636). 콜로니우스는 그의 책을 41개의 "토론 주제(dispntations)"로 분류하였지만, 원래 강요의 구분을 따르고 주로 칼빈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Analysis paraphrastica」에 대해 워필드(Warfield) 박사는 학생들의 입문서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델론의 책과는 달리 거기에는 난외 표제들과 색인이 없다. 950페이지에는 대략 강요의 삼분의 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간단한 요약 판보다는 조금 많은 분량이다.


VIII


   칼빈의 위대한 기독교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고전적 진술로 당연히 간주된다. 그 저술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의 범위가 기독교 신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되기까지 그의 손으로 증보되었다. 그 저술의 포괄성이라는 면에서 그것이 당대의 여타 신학 논문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의 우월성은 구성 순서와 균형 그리고 그 상세히 설명한 견해의 실질적인 일관성에 있어서 더욱 탁월하다. 완성된 저작에는 수없이 확대되고 내용들이 재배열된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질서 정연함은 설득력을 희생시켜 가면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도전적인 책으로서 독자에게 인격적인 요구를 한다. 이것은 강요가 저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내용을 설득력 있고 끈질기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회심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굴복시켜 가르침을 잘 듣도록 순복하게 하셨다"라고 썼고, 심오하고 지속적인 내적 변화의 결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살고 저술 활동을 했다. 강요 맨 앞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알려지는가라는 주제를 인상 깊게 다룬다. 그의 저서 전체에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 주권적 권능,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현재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그에게 있어 사변적인 사유와 결과도 아니며 사변적으로 사유케 하는 동기도 아니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변하는 지적 탐닉을 거절한다. 설혹 그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억제했다. 그는 비인격적인 탐구자의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는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 ㅡ 그가 보기에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다를 수 없는 주제임 ㅡ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및 우리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문제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연약하기 짝없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배와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의 뜻을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서 배우겠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알려주신다.
   칼빈의 정신세계가 단단하게 결합된 교리적 논리 구조의 여러 부분을 만들어내고 조립하는 일종의 효율적인 공장인 것처럼 생각하는 선입견을 갖고 칼빈의 대표작인 강요를 손에 잡는다면, 그는 이런 억측이 도전받고 분쇄되는 것을 즉각 깨달을 것이다.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저자의 지성만이 아니라 영적 및 감정적 존재까지도 그의 저작에 실려 있음을 깨닫는다. 칼빈이 후에 필립 시드니 경의 "네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써라"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이용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고대 격언의 좋은 한 예이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질서 있게 사고하는 천부적 재능을 소유하고 그의 믿음을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을 따른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을 가리켜 "Summa theologiae"(신학 대전)이라 하지 않고 "Summa pietatis"(경건 대전)이라 했다. 그의 왕성한 정신력의 비밀은 바로 그의 경건에 있으며, 그 경건의 산물이 그의 신학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신학은 그의 경건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다. 그의 과제는 (그가 본래 명명한 본서 제목의 말로 표현한다면) "경건의 총체와 구원 교리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본서를 준비하면서 그의 유일한 목적이 "순수한 경건론을 견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라틴어 최종판 서문에서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교리와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모든 경험은 사색에 대한 도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사유 능력을 초월해 있는 경험을 알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고 가는데, 거기는 사고의 능력이 미치지 않으며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라고 명령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최고의 신비인 성만찬의 신비를 그의 부족함, 즉 "나의 어린애 같은 작은 자(尺)"로 측량치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자들에게 성만찬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자신들의 한계로 인해 제한하지 말고 그가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해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인식된 최전선 내에서 그는 아주 명료하게 확신을 갖고 저술에 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에는 "경건"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그 말은 이제 비효과적이며 종교적인 감상적 태도나 위선적인 겉치레를 연상케 하는 의심쩍은 것이 되었다. 칼빈이나 그의 동시대인에게 경건이란 말은 고대의 이방 저술가나 기독교 저술가에게 있어서처럼 불쾌한 함축이 전혀 없는 진실한 단어였다. 경건은 가족이나 국가 또는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게 헌신하는 것, 즉 칭찬할 정도의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 칼빈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를,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선결 요건이라고 했다. 이 원칙을 처음으로 언급할 때,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했다. 경건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으로 돌리고, 자신들을 양육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 바로 그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경건(pietas)이란 말은 칼빈의 저작들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며 『강요』에서는 마치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기 위해 울리는 경종처럼 되풀이해서 나오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에밀 도머그는 말한다. 미첼 헌터는 말하기를, "경건은 그의 인격의 본질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전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가 그에게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뼈대로서의 신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건전한 신학의 필요불가결한 선조건인 이 종교적 태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으로 돌리므로", 칼빈의 책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며, 하나님에 관한 관념 혹은 균형잡힌 견해들을 갖고 장난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세세한 면에서 저자에게 동의하느냐에 관계없이 독자는 그가 그 자신의 종교적 투쟁의 동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들과 관계를 갖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모호하게나마 의식하게 되는 종교적 통찰들과 영적 자극들을 그는 특별히 명확하게 설명하는 지적인 보고자였다.
      칼빈의 명료한 표현들은 처음에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사상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독자들의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주며 그의 저작에 정통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의 사상에 해명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의 신학에 대한 설명들은 종종 서로 충돌하며, 『강요』에 나타나는 그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몇몇 측면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대 개신교 신학 논쟁의 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고전 논문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공통된 운명이다. 『강요』는 후대 사상가들의 사유의 창고이며, 강요가 그들에게 이제 막 생각해 낸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때, 『강요』로 하여금 그 자체의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내도록 하기 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공식 표현들의 전거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강하다. 칼빈이 그의 은혜론과 관련하여 자연을 다룬 것은 특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의심할 나위없이, 칼빈은 신에 대한 의식이 인간의 최악의 상황조차도 그것을 지워버릴 수 없을 만큼 인간의 마음에 도저히 씻을 수 없게 새겨져 있음을 한편으로는 적극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의식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놀라운 생각과 솜씨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암시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시며 그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이 남긴 죄의 유산 때문에 심히 손상을 입었으므로 그들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는 바를 보지 못하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그릇되고 무가치한 것뿐인 생각들을 가지고 우주라는 이 밝은 극장을 눈먼 채로 더듬고 다닌다.


IX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곤경에 처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다. 일반적으로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할 때, 그는 그것을 정경과 구별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단지 성경에 씌여진 말씀에만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지혜로서 모든 신탁과 모든 예언들이 거기로부터 나온다." 이 문맥에서 그가 말하는 '영원한 지혜'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는 말하기를 고대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만물을 지으신(요 1:1) 말씀 곧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을 알게 하는 매체인 기록된 말씀의 저자(Author)이시다. 이렇게 이해하면 칼빈에게 성경은 확실하고 무오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며 그가 항상 의지하는 바이며 자원이 되는 것이다. 그가 각 논점들을 성경의 구절들과 신속하게 관련시키는 것은 놀라울 정도이며, 아마도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그가 성경 본문에 정통해 있다고 해서 무절제하게 과도한 인용구만으로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지나치게 인용을 많이 하였다고 보이는 곳에서는, 대체로 반대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성경 본문을 그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사용된 성경 구절에 실제로 내포된 교리보다 더 많은 양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구절을 무리하게 사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성경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논증에 맞지 않는 성경 본문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처럼) 자의적인 영해(靈解)를 함으로서 그 사용을 정당화하려고 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와 같이 "성경을 갖고 장난질하는 것"을 폭로하는 데 항상 빈틈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단순하고 축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그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는 교조적 해석을 확증하기 위하여 알레고리를 이용하는 것을 경멸하였고, 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을 입증할 때만 성경을 인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칼빈은 의심한 적이 없으며, 그는 그의 독자들도 이와 같은 확신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의 논쟁에서 "축자적 무오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알려준 신탁과 환상들에서 기원하며, 족장들은 그 속에 담긴 진리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것들을 구전으로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후세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시를 기록하게 하실 때까지만 계속되었다.
   인간 저자들은 기계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록한 진리를 그들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가 거룩한 저작의 권위 문제를 강조할 때조차도, 그가 항상 그 저자를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 같으며, 그가 설명하려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이다. 따라서 사도이자 저자들인 자들을 가리켜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기록자들"(불어판에서는 "선서를 마친 공중인들")이라고 한 그의 말이 종종 인용되는데, 이때에도 그 문맥은 성경의 단어들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단어들이 나타내는 영감된 교훈을 가리킨다. 그는 실제로 영감의 방식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다룬 바가 없다. 그가 영감을 단어 자체와 관련시키는 듯한 구절이 그의 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주된 관심은 단어를 넘어서는 그 메시지에로 독자들을 인도하는데 있다. 영감의 방식에 대한 입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강요』 뿐만 아니라 그의 주석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칼빈보다는 오히려 일부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그도 성경이 완전 무오함을 아무 조건없이 주장하고 싶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구절들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의 차원에서 무오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시편 51:4을 인용할 때 부정확하게 옮겼다는 점을 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의 말을 인용할 때, 내용이 일치되게 인용한다면 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종종 상당히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단어를 양심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quare non tantum illis fuit verborum religio]." 여기에 사용된 verbor. um religio라는 표현은 해석중인 구절의 몇 개 단어 각각에 대해 억지로 꼼꼼한 체하는 주장을 토대로 논쟁을 벌이는 논적들을 경멸스럽게 묘사하는 말로 「강요」에서는 나타난다. 칼빈의 예리한 문체 감각은 성경 기자들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적용된다.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요한"은 "변변치 않은 천한 문체"를 사용하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메시지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사야의 "우아한 문체"와 아모스의 "거친 문체"가 모두 성령의 "위엄" 묘사에 사용되고 있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교회가 그렇게 선언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토대가 되는 성경 자체에 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은 합리적 증명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건전한 신앙 형성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자명하고 확실하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성적 사고보다도 훨씬 탁월하다. 경건에 필요한바 성경이 신(神)의 진리라고 하는 확실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바로 그때에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바로 그 입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이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성령은 또한 성경의 해석자이며 독자들의 마음에 성경의 가르침을 인치신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읽을 때 그것은 성도의 무오한 진리의 책인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 조직 원리로 삼으며,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주요 임무이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어야한다"고 말한다. 「강요」의 초점은 기록된 말씀이 알려주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항구적인 관련성을 배제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 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복종의 강요 등을 발견하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성경에서 교회의 조직과 훈련의 마땅한 지침이 되고 교회의 공중 예배를 마땅히 주관할 원칙들을 찾아내 확인한다. 이것은 사도들 이후의 이런 사항들의 혁신은 모두 성경의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널리 퍼져 있던 미신을 공격할 무기를 성경은 칼빈에게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그는 또한 그가 보기에 성급하고 무책임하며 왜곡된 성구 해석을 제시하는 그의 동시대인들을 혹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는 마태복음 26:26을 다룰 때, 그는 그 자신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성경 전체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처럼 이 구절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얻는 것 못지않게 순종하며 연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에 언뜻 생각난 것을 비뚤어진 열심으로 아무 분별없이 성급하게 움켜잡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부지런히 숙고한 다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 의미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것에 어긋나는 모든 세상 지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진실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 말씀에 단 한 마디의 말일지라도 저항의 말을 감히 제기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그 의미에 대해 감히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X


   칼빈 자신이 고백하는 대로 그가 어거스틴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강요 전체에서 항상 명백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능력에 관한 반(半)펠라기우스적 견해를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때에도, 칼빈 이전의 새 사람들은 인간 자신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능력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새롭게 확증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849년에 이단으로 정죄당한 오르바이스의 고트샬크 이후, 철저한 어거스틴주의의 대표자로 유명한 첫 번째 사람은 신학자요 성직자였던 토마스 브래드워딘으로서, 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라고 불리웠으며, 1349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었다. 그는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이란 긴 논문에서, 자신은 일찍이 어리석고 공허하게도 그의 주변에서 널리 유행하던 펠라기우스의 사상들을 받아들였으나, "은총의 빛이 비추이듯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과 성경을 늘 인용하면서, "은총은 과거의 공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예정은 공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리미니의 그레고리도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는 1358년에 어거스틴 수도회 총회장을 지내다 죽은 인물이다. 이러한 교리 측면에서 보면, 위클리프는 어거스틴의 제자였고, 죤 후즈는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위클리프적이었지만 거의 위클리프 못지않은 어거스틴계 인물이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종교개혁은 내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성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검토하기를 마지않는 어거스틴에게서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두 종교개혁자는 솔직히 인정한다. 칼빈은 후기 어거스틴주의의 정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인간과 구원을 다루면서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대거 인용하였기 때문에 이 항목들에 있어서 그의 교의는 아프리카인이었던 그의 대선배의 교의와 전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그의 견해가 어거스틴의 견해와 때때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무비판적인 제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유기(遺棄)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특별한 결정이라고 하는 "이중 예정"을 명백히 주장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을 넘어선다. 확실히 이러한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해한 확신을 성경 독해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확증하고, 그 확신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음으로써 칼빈 신학의 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다른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근원적으로 봉쇄해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란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질 것이라든가 아니면 선할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영원히 정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정통적이며 거의 논의의 여지없는 신앙이다. 칼빈이 일부 사람에 대한 이런 정죄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작용과 결부시킨 것에 있어서는 그보다 앞선 몇몇 어거스틴주의자들과 같지만 주장의 강도와 엄밀성은 그가 훨씬 크다. 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각각 어찌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따라 결정되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화를 당하는 것이 그 운명으로 결정된다. 여기에서 그는 신학의 두 가지 평범한 문구를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칼빈 자신에게조차도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많은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정죄 받은 자에 관한 이 작정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부정하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유기 교리를 대단히 엄밀하게 진술하고 새삼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실 때 선택받지 못한 자를 "지나쳐 가게" 하는 것에 국한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의지 작용은 "간과"가 아니라 "유기"이다. 바울이 "그런즉 하나님께서···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말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지나쳐 버리는 자를 유기하신다"고 비슷하게 간결한 주장을 한다.
   칼빈은 이런 결론을 해명하고 수호하는 동안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전율했으며, 거기에 내포된 도덕적 난점도 잘 알았다. 그래서 죄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란 주장을 펴기 위해 그 결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인하여 조금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 많으시며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얕은 이해력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표현되지만 말이다. 칼빈이 예정에 그토록 오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그 자신이 예정의 신비 앞에서 크게 놀랐다는 사실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주제를 언급할 때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선택되었을까 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성숙한 신앙을 지닌 성도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겸손한 자세로" "이 높고 불가해한 신비"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선택의 열매들은 어떤 점으로 보나 이 세상에서 누리는 외적인 이익이나 번영 등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경견이 세력을 떨치고 번성하며, 경건한 자들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택받은 자의 축복은 그들이 고난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확고한 보호를 확신하는 것과 내세를 내다보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


XI


   칼빈은 소위 중생이라고 하는 영혼의 변화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육신의 금욕과 영의 소생을 포함하는 진실한 회개가 수반된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우리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영적 사업 즉, 이생에서는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일에 참가한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실망해도 좋다는 권고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장래 삶의 실재에 대한 의식의 증대와 결부된다. 바로 그 삶을 우리는 열망하며 고대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순례와 시험의 장소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칼빈은 이 세상에서의 의무나 이 세상의 부탁을 언짢아하며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균형 잡히고 파급적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지침을 다섯 장에 걸쳐서 제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암묵적인 조건하에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다. 여기에는 자기 부정과 남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포함된다. 그들이 아무리 고집 센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권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들에게서 발견해야 한다. 종말론에 관한 현재 논의에 비추어 장래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다루는 것은 아주 인상적이며, 현생에서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향유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칼빈에게 성화는 우리가 인생행로를 지나는 동안 우리의 소명 추구와 경건에 진보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믿음과 회개와 칭의 등을 다룸에 있어 종교개혁 시대에 충분히 논의된 이 교리들을 그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다. 믿음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 이상의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은혜를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로나 율법과는 거리가 멀다. 칼빈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믿음을 경건과 사랑에서 분리시켜 다루는 것을 비난한다. 그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믿음이 스스로 의를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은혜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XII


   제4권에는 이전 판의 여러 부분에서 발췌된 내용과 교묘하게 통합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있어서, 제4권은 그 자체가 잘 정리된 하나의 논문을 구성하고 있다. 칼빈은 이 책 제목을 "The External Means or Aids by Which God Invites Us Into the Society of Christ and Holds us Therein"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회는 거룩한 공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칼빈의 정신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 대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그의 능력과 재능을 모두 투입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동일한 실체를 가리킨다는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선택받는 자들로 이루어진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불가시적인 교회는 구성원들을 서로 알고 있는 지상의 가시적인 조직 교회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묘사한 키프리안(Cyprian)의 비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교회는 그러한 자격으로 그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며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가시적 교회에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믿음을 고백하고 삶으로 실천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판단하여 교회의 구성원들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참되게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청종하는 것, 성례전의 바른 집행, 그리고 그것들보다는 하위에 있지만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공동체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을 시행하는 것 등, 그러한 표지들로서 교회가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의 위험이 아주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우리들은 누구나 결함 있고, 눈을 흐리게 하는 무지라는 병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의 용서가 항상 필요하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사회라는 사실이 본서에서는 특히 강조된다. 가시적 교회는 그것의 성취 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발전과 목표 면에서 거룩하다.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은 왜곡되고 훈련이 실패한 바로 그때에만, 그리스도인들이 그 조직을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칼빈은 교황권을 고집하는 교회 내에도 참된 교회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그와 같이 떠나도 좋은 이유들을 발견하였다. 사역과 사역의 직분 그리고 그 기능에 관한 고귀한 교의가 신약성경의 증거를 토대로 하여 충분히 설명되고, 성직(聖職)의 발전과 타락을 교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한다. 풍부한 교회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칼빈은 중세의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권위가 로마에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권을 점점 더 강도 있게 요구하고 그것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활기차게 논박하였다. 지나치게 많은 욕설들을 관련 장(章)들에서 제거한다면, 그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련 세력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역사적 변화들을 고찰하였다.
   그의 성직론은 장로들과 구별되는 감독직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관리와 훈련 기능을 담당한 고대의 성직 제도를 상당히 중시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칼빈이 보기에 로마 교회 성직 제도의 최대 결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보니파체 3세가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권을 주장하고 나선 이후 즉 대(大)그레고리 이후, 특히 교황 자카리와 프랑크의 통치가 삐뺑 사이에 협정이 체결된 이후 시대에 교만하기 짝없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였다. 칼빈은 이들의 동맹을, 권력을 장악하고 분할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한다. 그는 9세기의 Pseudo-Isidorian Decretals를 효과적으로 폭로한 최초의 문서인 「마르데 부르크 세기들」(Magdeburg centuries, 1559-1574)이 나오기 이전에 이 장들을 저술하였지만, 그 사기 문서들을 냉소에 붙인다. 그는 콘스탄틴의 증여에 관한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의 폭로 기사를 읽었고, 그에 따라 그 8세기 문서 또한 위조라고 간주한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 주장의 결과로 부패가 점차 만연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교황 지배하에서의 상황이 마침내 교회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권위를 말씀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부패한 교회와 그 위원회가 차지하였다. 그는 위조문서들로 무장한 교황청이 그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면서 발생한 사법권의 숱한 남용 사례들을 격렬하게 공박하였다.
   칼빈은 또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훈련과 성례전을 건설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혁교회 초기의 훈련 관행과 유사점이 거의 없는 교회 훈련을 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전제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가 매우 높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훈련이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그것은 지체들을 결집시키는 끈, 또는 자제를 위한 고삐, 혹은 아버지의 징계의 회초라기와 같은 것이다. 누구도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훈련 과정을 면제시켜 줄 수 없다. 이 과정들은 그토록 종교적 중요성을 갖고 시행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법정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있을 수 없다. 훈련을 통하여 얻으려 하는 목표들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교회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 선(善)을 부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위반자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훈련은 엄격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드러워야 한다. 칼빈은 바울, 키프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크리소스톰이 위반자들을 다루면서 형제애를 가지고 신중하게 처신하였던 예들을 깊이 상고한다. 우리들은 완고함 때문에 출교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포기하거나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그들을 멸망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XIII


   이 주제들을 다루면서 칼빈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한 그의 인식을 매우 확신 있게 표명할 수 있었다. 그는 무려 다섯 장을 할애하여 성례전, 즉 주의 만찬을 다루고 "성례전이라고 잘못 불리는" 다섯 의식을, 즉 견진, 고해, 병자성사, 서품, 혼인 등에 나머지 장들을 할애하였다.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라고 규정한 어거스틴의 성례전 정의를 인정하지만, 그보다도 칼빈은 "성례전이란 외적 표징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는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표출하였다. 이 관계에 의하면,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印)이며,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교환되는 서약이며, 우리의 제자 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과 성령께서 공급하는 불가시적 은총(恩寵)이 없으면 공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례를 다룸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아 세례를 옹호하는 점이다.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합법적인 입회 성례전으로서의 할례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된다. 이 외에도 칼빈은 가장 타당성 있는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불러 팔에 안으시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마 19:13-14)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신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곧 "죄"이다. 이것은 특히 재세례파들처럼 세례 받지 않은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보면 반박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임종 직전에 있는 자들에게 평신도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상황에서는 세례의 예식을 갖추지 말고 신속하게 세례를 집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칼빈이 성례전 곡해로 간주하는 그것은 세례 받을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은 그로 인해 정죄 받은 것이라는 그릇된 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아기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들을 당신의 자녀들로 받아들이셨음을 선언하셨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례가 구원의 경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구원 의식이 아니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유아기에 죽은 유아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자를 그 때문에 정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한다. 전통적 견해인 세례 중생론을 폐기시켠서 칼빈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교회가 용납하고 교회에 입회할 것의 의미를 점차 배우고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을 때 은밀한 영향력이 그 아이의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세례를 받고 미래의 회개와 믿음을 성취한다."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루터파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부활 성체 편재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전용 빵과 포도주를 통해 현재화된다는 것은 거부한다. 다른 구절들에게 유추하여 "이는 내 몸"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일종의 환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로 들리워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 몸은 현재까지도 하늘에 계시고 빵과 포도주에 갇힐 수는 없다. 오히려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는 영적으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가 그 몸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의는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이다. 칼빈의 성례전론을 단순히 "영적 현존론"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그의 교의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적합지 않다. 그의 입장을 현대인들이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예정론을 다룰 때처럼 여기에서도 자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에 직면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험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Communion)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교회의 공통체적 삶에서 이 성례전이 중요함을 평가하는데 칼빈을 능가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그는 성례전이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경건한 참예자의 종교적 경험을 열렬하게 묘사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생겨나는 "사랑의 띠"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무라는 의미와 아울러 강조한다. 로마 교회의 미사(Mass)론에 대해서는 특히 미사가 죄에 대한 보상 행위라고 하는 주장과 관련하여 공격하였다. 그는 미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부정하고 성찬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소위 성례전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다섯 의식을 지지하는데 이용된 논증들에 대해서도 욕설을 퍼부으며 공격하고, 그 의식들이 성경의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초대 교회에서 집행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XIV


   마지막 장인 "국가"(Civil Government)는 제4권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 중 하나이다.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처럼, 이 장은 칼빈의 사상이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는 세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헌사에서 이 청년 학자는 그 오만한 군주에게 선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제시한 자들의 악한 조언을 거부하라고 감히 권고한다.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그의 유명한 "제후들의 거울"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시녀로 만든" 제왕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칼빈은 그 말을 반영하는 한 구절에서 왕의 "진전한 왕권"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사(公使)'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마지막 장(III. xix)이 머리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 장 끝에 정부라는 주제가 도입되는데, 그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등 신학(high theology)의 입장에서 보면, 「강요」가 이것 외에 다른 항목으로 끝맺기를 기대하였을 수도 있다. 1539년부터 1554년까지의 판본들에서는, 이 장이 처음에는 끝에서 세 번째 그 다음에는 두 번째에 위치하였었다. 그러나 1559년 판에서 그것은 1536년 판에서의 위치, 즉 강요의 결론부로 다시 돌아왔다. 칼빈이 정치 사회라는 주제에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할당하기로 결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이 장 안에서 그리고 정치에 관한 그의 다른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다른 스콜라 학자들처럼 그가 정치를 다룸으로써 그 주제는 신학의 한 영역이 되었다. 그 장에서는 성경 말씀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성경은 그의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이 주제가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은 통치자들의 정치가 동요하면 종교개혁에 투신한 사람들의 운명과 교회 개혁이 어떻게 영향 받는가를 그가 항상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초판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처음 것보다 약간 확대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반대자들이 종교개혁이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 운동이라고 규정하던 뮌스터(Munster) 사건이 고조에 달한 때에 쓰여졌다. 칼빈은 정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종교개혁을 위한 그의 변증의 일부이며 그 논문 절반에 걸쳐 그가 주장한 교의들을 실제로 옹호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제나 느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의 서신들은 그가 복음적 경건의 앞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꽉 차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관련 문제의 주요 논점은 정치 사회가 그리스도 교회를 섬기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니젤(Wilhelm Niesel)처럼 "그는 국가 자체만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영적으로 약혼하였다고 하며 정치적 관심사들과 의무들을 오만하게 무시하는 "열광주의자"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정치적 국가는 근절시켜야 한다는 사상은 그가 보기에 불쾌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국가의 기능은 빵과 물과 태양 및 공기 등의 기능과 다를 바 없다. 국가의 영예스러운 자리는 실로 훨씬 더 탁월하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목적에 기여하며, 이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국가는 인간사에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기독교의 공적 형태를 보호함으로써 최대의 기여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호의와 지원에 의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칼빈은 다스리는 사람들의 의무만이 아니라 정부 형태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주석에서 구약 성경의 몇몇 경건한 왕들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당시의 왕들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보면 대체로 비우호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왕권 자체를 거부하는 함축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여러 정부 형태들을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곳에서는 정부와 협력할 것을 촉구하고 그것들이 억압적인 곳에서는 인내할 것을 요청하였다. 폭력 혁명을 그처럼 반대하려고 했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정부 형태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족정치 또는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혼합형 체제"를 단연 지지한다고 조용하게 선언한다. 이 유명한 진술을 그가 최초로 한 것은 1543년 판에서였고, 1559년 판에서는 그 진술 다음에 그 특성에 대한 설명을 삽입하였다. 왕들은 선하고 유능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인간에게는 결합이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권고하며 혹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제재할 수 있도록 다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최상이다. 다수의 통치와 상호간의 형제적 교정의 원칙도 교회와 국가 조직의 각 단위들에 적용된다. 그 원칙들은 칼빈이 다스린 제네바의 성직자 모음과 행정관 모임에서 통상적인 실천을 통해 예증되었다.
   본서를 끝맺는 감동적인 문구들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것을 제외하면 1536년 판과 다른 것이 없다. 거기에는 정치학 논문에서는 하나의 상식처럼 된 간결하고 놀라운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칼빈은 현대 국가들의 "세 계급들"(귀족, 성직자, 평민)은 왕의 억압에 맞서서 백성들의 자유를 지키는 합헌적 수호자로서, 고대의 민선 장관, 호민과 그리고 수석 치안판사의 기능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애써 온유한 어조로 제안한다. 이것은 반란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행정 장관들에게 법에 따른 직능들을 수행하라고 호소하는 제안이다. 위에 언급된 고대의 행정장관들이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피상적일 수도 있다. 칼빈의 저서 마지막 절들은 힘이 넘쳐흐른다. 그 절들에 대해 숙고한다면, 그의 가르침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정치적 행위 또는 이익에 의존해야 한다는 제안은 모두 삭제하였다. 우리들은 왕들의 분노로 인해 위협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귀중한 희생을 치르고 구속하신 우리들은 신앙을 양보하거나 인간의 타락한 욕망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한다.


XV


   칼빈의 다른 저서들과 마친가지로 그의 「강요」가 널리 보급되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문체가 뛰어난 것과 무관할 수 없다. 문체에 대한 논할 대, 주로 고려되는 것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일 때가 종종 있지만, 동시대와 그후 많은 학자들은 그가 라틴어 작가로 성공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슈트라스부르크에 거주하는 칼빈의 친구 존 슈트름(John Sturm)은 1543년 라틴어판 강요의 제목 페이지에 추천사를 쓰면서 그 저서와 저자의 특징을 적절히 묘사하였다. "죤 칼빈은 아주 예리한 판단력, 최고의 가르치는 은사 그리고 탁월한 기억력을 천부적으로 갖춘 사람이었다. 저술가로서 그는 다양하고 풍부하고 순수하다." 뛰어난 학자인 죠셉 스칼리지(Joseph Scaliger)는 "그의 문체가 신학자에게 적절한 글 이상으로 매우 순수하고 우미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1609년 죽음). 그처럼 펜을 적절하게 구사한 사람은 확실히 거의 없다.
   그가 라틴어에 정통하게 된 것은 그가 받은 교육의 덕택이었다. 그가 분별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그에게 라틴어를 최초로 가르쳐 준 파리 대학의 마두햄 꼬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칼빈에게 라틴어 학습의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가 훗날 성취한 모든 것들이 가능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14세 때 라틴어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었고 라틴어가 의사 전달과 설득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는 고전들을 연구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라틴어 어휘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브렌(Q. Breen)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의 침전물"에 대해 말하고, 웬델(F. Wendel)은 '칼빈이 1532년에 인문주의자가 된 이래 언제나 다소간은 인문주의였다'고 진술한다. 이 작가들은 문체 이외의 것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어 고전들이 문체 면에서 그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브렌은 말하기를 "그가 저술한 모든 것에는 확실히 우아함이 깃들어 있고 고전의 명료함이 빛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그가 보통 때와는 달리 웅변적이거나 풍자적일 때는 그가 키케로를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칼빈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들의 "문체로 결코 모방하지 않았다." 키케로와 퀸틸리안은 칼빈이 고전의 모범들에게 자유롭게 일탈한 때문에 고통을 받았을지 모른다. 베르망은 그가 특히 추상적 용어와 그의 어휘를 신장시켜 준 대중 언어의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고전 이후 그리스도교 라틴어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베르망은 또한 그의 어순을 강조할 때 임의로 변경되고, 동사는 문장 끝보다는 중앙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강요」에서 그는 긴 도미문(掉尾文 : 주절이 문미에 오는 글)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만, 키케로와 다른 점은 그의 글에는 키케로의 인위적이고 운율적인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병행 구문과 삼중 구문, 동의어 반복 그리고 보다 복잡한 장치들을 사용하여 운율적 효과를 얻는다. 청각 효과에 대한 관심은 인접절에서 두운, 유운(類韻), 반복, 재담, 각운 등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칼빈은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하게 식별해 낸다. 그는 특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경 구절들을 즐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거칠고 꾸밈이 없는 언어가 사용되는 부분들에도 신성이 마찬가지로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부분적으로 과도한 수사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수사학과는 무관한 "진리의 힘"을 진실로 소유하고 있다. 문자화된 강론으로서의 성경을 그가 존중한 것은 칼빈의 문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고전 전통의 영향을 상쇄시키는 영향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교부 시대 저술가들의 영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논문들보다는 그의 대중 설교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성경 저자들이 명료성, 단순성, 간결성을 보여준다고 그들을 격찬하는 경우가 매우 잦으며, 이 세 가지 특성들은 그가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들이다. 사실 그는 문체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의 사상을 명확하게 그리고 말의 낭비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간결함은 그가 종종 찬양하던 특성이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 원칙으로 인해 그가 부연하고자 하는 유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장황한 저술가들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특히 긴박한 종교 문제들이 현안이 되고 있는 곳에서 그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존경하는 친구와 동료들이었던 부처와 파렐까지도 비판하였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파렐의 "복잡하고 정교한" 문체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반대하고, 그의 문체와 자신의 문체와 차이점을 지적하고 어거스틴까지도 같은 이유로 질책하였다. 칼빈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어거스틴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그의 장황함에 나는 불쾌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겠네. 더욱이 나의 간결함이 더욱 간결하게 되기를 바라네"라고 하였다.
   그가 문장을 간결하게 쓰는 법을 체득하였다고 하는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길게 논문을 쓴 저자에 대해 그의 문장이 간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강요」에는 우리가 보기에 지루할 정도로 문장이 길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구절들이 많다. 여기에서 오늘날에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 당시의 어떤 신학적 관심거리들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문체의 한 특성으로서의 간결함을 판단하는 진정한 기준은 「강요」와 같이 방대하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로 계획한 길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가 간결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의 표현들이 "과중하지 않다"는 것과 "그는 지루하게 하는 구절은 있을지라도 장황함은 없다"는 에밀 파게(Emile Faguet)의 말이 아주 적절하게 들린다. 그의 문장과 단락들은 사상으로 꽉 차 있고 구성 문제들을 조금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로 압축된 표현들이라는 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칼빈의 글은 그의 깊은 확신 때문에 어느 구절들에서는 웅변적 성격을 갖는 긴박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설득력이 있는 까닭은 형식 논리 때문이라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브렌이 지적한 대로 그의 논증은 형식면에서 볼 때 언제나 삼단논법, 즉 생략삼단논법을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간결성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명제는 독자가 채워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논리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독자는 보다 빠르게 설득을 당한다.
   간결성의 원칙을 통상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있다면 논의 중인 입장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종종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와 부사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때때로 칼빈은 비난과 욕설에 통달한 대표적 인문학자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욕설 당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멸적인 폭언을 종종 구사하였고, 때로는 적대자의 정당한 견해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에게는 이러한 일이 칼빈의 저서를 부분적으로 손상시키는 개탄할 만한 작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경우에 독설은 논증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이 논증의 힘을 강화시킬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서 비롯된 시도이다.
   칼빈의 설득력은 그의 적의와 부정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강한 긍정적 확신들과 그의 풍부한 저력에 기인한다. 이 저서는 그가 후세대들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다. 오늘의 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새로운 관심사들조차도 그 메시지의 관련성과 진가를 조금도 감퇴시키지 않는다. 칼빈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온갖 주제들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소홀히 한다····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며 인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준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에게 이 한 가지 목적이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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