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ristic Theology/Other Theologians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azianzenus, 330)

Bavinck Byeon 2014. 4. 3. 23:41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azianzenus, 330)



1. 인간의 상태

 

(a) 은혜와 자유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주어진 사람이 받을 수 있다."(마 19:11) 당신이 '그것이 주어진' 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이교적인 개념에 굴복하지 말라. 다양한 종류의 본성들, 즉, 지상적인, 영적인, 중간적인 본성을 도입하지 말라.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지옥에 갈 운명적인 본성을 지녔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운명지어진 본성을 지녔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상태가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선으로나 악으로 가게 운명지어진 본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정도로 완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연스러운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단순한 성향은 사람들을 완전하게 해주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부싯돌이 강철로 그어질 때 부싯돌에서 불이 켜지는 것처럼, 이것을 생기게 하는 것은 신중한 선택이다.

 

'그것이 주어진 자에게' 라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부름받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결정이나 인간의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문제이다" 라는 말을 들을 때도 똑같이 덧붙여 이해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덕행으로 우쭐해져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신용하고 지혜를 주고 선한 것을 모두 공급해 주는 창조주를 신용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바란다면, 혹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친절한 선물인 옳은 것을 바로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진다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유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은 인간이 결정할 일이 아니며" (즉, 인간의 결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행위로만 된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된 것" 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의지의 작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린다.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달릴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싸울지라도 면류관을 주는 그분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요청에 응답했을 때.]

"내 좌우편에 앉히는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는 그것이 주어진 자들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통제하는 원리인 마음에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근면, 혹은 이성, 혹은 철학에는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금식은 헛된 것인가? 그리고 철야기도, 맨땅에서 자는 것, 넘쳐흐르는 눈물은 어떠한다? 그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것들인가?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한 선택에 달려있는가? 그래서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예레미야는 축성되고 다른 사람들은 거부되었는가?

 

나는 여기에 어떤 터무니없는 이론이 도입될까 두렵다. 즉 영혼은 다른 곳에서 살다가 이생의 육신에 결부되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의 이러한 삶의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고, 한편 이전에는 악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저주받았다는 터무니없는 이론이 도입될까 걱정스럽다. 이러한 가설은 어리석은 것이고 교회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학설들을 가지고 놀게 하라. 우리는 그러한 놀이들을 불안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곳에서 또한, '그것이 주어진 자에게' 라는 말 다음에, '가치있는 자들' 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는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기여한 것에 기인한다. <or. 37. 13, 14, 15>

 

(b) 창조와 타락

 

[천사들-비물질적인 지성들의 창조, 그리고 감각으로 감지되는 물질 세계의 창조.]

이렇게 구별되는 정신과 감각은 그들 자신의 경계 안에 자신들을 보존하고, 자신들 안에서 창조적인 위대한 말씀을 증거하며, 침묵 속에 있는 위대한 사역을 찬양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선포한다. 그 둘이 섞이지도 않고 이들 상반되는 것들의 혼합도 없는데, 이것은 자연들의 창조에 더 큰 지혜가 있고 더 관대함이 있음을 나타낸다. 모든 선의 부요함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것은 장인-말씀(Craftsman-Word)이 나타내 보이기로 결정한 것이었고, 그는 둘(불가시적인 본성과 가시적인 본성을 의미한다) 가운데서 형성된 유일한 생물체를 산출했다. 즉 그는 사람을 만들었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물질에서 몸을 취했고 그 속에 자신에게서 취한 생기를 (그것을 [성서의] 말씀은 지적인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있는데) 불어넣었다. 이 사람을 그는 제2의 세계의 종족으로, 소우주로 땅 위에 세웠다. 다른 종류의 천사는 가시적인 피조물을 완전히 전수받은, 그러나 지적인 세계에 관해서는 단지 신참자인, 혼합된 본성의 경배자로 세웠다. 그는 땅 위에서 만물의 왕이었으나 하늘에 종속된 존재여서, 지상적이고 천상적이며, 일시적이지만 영원한 존재이고, 가시적인 질서와 지성적인 질서에 모두 속하고, 똑같은 존재 속에서 영적이고 육적인 존재가 결합하여 위대함과 비천함 사이의 중간에 있다. 영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육적이라 함은 먼지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혼은 인내하고 그의 은인을 영화롭게 하고, 육신은 견디며, 견딤으로써 그의 위대함이 그에게 야망을 갖게 할 때 상기되고 겸손해질 수 있게 한다. 이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생물체로서, 한편으로는 다른 상태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고, (이것은 그 신비의 극치인데)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향하는 경향이 있는 이성에 의해 신격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유의지의 선물을 수여하여, 선한 것들이 그 종자들(seeds)을 공급해 준 자에게만큼 선택한 자에게 속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낙원에 두었는데, 그 낙원이 무엇이었든지간에, 영원한 식물들의, 즉 아마도 보다 더 단순하고 보다 더 많이 진보한, 신적인 관념들의 재배자로서 인간을 낙원에 두었다.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단순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생활했으며 어떤 외피도 없었고 방어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최초로 창조된 사람에게 적합한 상태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율법을 주어 그의 자유의지를 연습할 재료가 되게 했다. 이 율법은 그가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나무들과 그가 금해야 하는 나무에 대해 말하는 명령이었다. 후자는 선악과(Tree of Knowledge)였다. 그것은 본래 악한 의도로 심기운 것도 아니고 질투로 금지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적들은 그들의 중상을 이런 방향으로 돌려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뱀에게서 그 구실을 취했다. 그것은 만일 적당한 때에 먹으면, 선의 근원이 되도록 심기워졌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상술하는 바와 같이, 이 나무는 인격의 발전에서 진보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이 오르기에만 안전한, 명상(Contemplation)이다. 그것은 식욕이 그들의 발전을 능가하는 자들을 위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어른의 음식이 아직 우유를 먹어야 하는 아직 약한 자들에게 적당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악마의 적의와 무례하게 여자를 속임을 통하여 아담은 타락했다. 그녀는 유순하기 때문에 유혹받기 쉬웠고, 그녀의 권유하는 힘 때문에 그녀의 남편을 연루시켰다. (아아 나의 연약함 때문에! 나의 첫번째 조상의 그 약함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는 그에게 주어진 계명을 잊어버렸고 그에게 쓴 맛을 봄으로써 정복당했다. 그리고 곧장 그는, 자기의 약함 때문에, 생명나무로부터, 낙원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하고, 가죽옷을, 즉 아마도 죽을 운명이고 반역적인 더 두꺼운 육신을 입었을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부끄러움을 지각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 여기에서조차 어떤 은혜를 입는다. 즉 죽음과 죄를 줄이는 은혜를 받아서 악은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벌은 자비의 행위인 것으로 판명된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기에, 이것이 하나님이 처벌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or. 45. 8, 9>

 

(c) '아담 안에서'

 

하늘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소유물이고, 그들 주면에 있는 태양과 달도 그러하다. … 그리고 하나이면서 똑같은 땅도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우리의 어머니이며 우리의 무덤인 땅으로부터 우리는 취해졌고 거기로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그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없다.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조차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재형성되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똑같은 아듬을 공유하고 뱀에 의해 오도되고 죄로 죽음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두 천상의 아담을 통하여 회복되어 구원받았고, 불명예의 나무를 통하여 생명나무로 되돌아 갔고, 거기에서부터 우리는 타락했다. <or. 33. 9>

 

(d) 원죄와 유아세례

 

하나님은 나를 신으로 만들지 않았지만 나의 본성을 이 길이나 저 길을 가꿀 수 있도록 형성하였기 때문에, 그는 나를 도울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세례반(font)에서 은혜를 준다. 왜냐하면 옛날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장자가 죽었을 때, 문설주에 피를 발라 깨끗이하여 파괴자를 피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호자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반(laver)의 인을 찍어 준다. 그것이 티없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의 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른들에게는 인이며 치유의 약이다. <poem. dogm. 8. 85>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나이 때문에 혹은 완전히 본의 아닌 어떤 사건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정의로운 심판자의 손으로, 영광도 징벌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한편 그들은 인을 받지 못한 반면, 징벌이 없고, 이 결핍을 본의 아니게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받을 만하지 않은 자가 명예로워질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아니고, 명예로워질 가치가 없는 자가 처벌받을 만하다는 것은 아니다. <or. 40. 23>

 

2. 그리스도의 신분

 

아들의 복종

 

[고전 15:25은 아들이 열등하다는 아리우스주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하여 유노미우스가 사용한 구절이다.]

나에게는 저주를 제거하는 자는 나 때문에 저주라 불리었다. 세상의 죄를 속량한 자는 죄라 불리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아담이 되어서 옛 아담을 대신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는 전체의 머리이므로, 나의 불순종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함에 의해 그리고 나의 고통 때문에 내가 불순종하고 반역적인 한 그리스도도 또한 나에 관하여 불순종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들을 복종시켰을 때 … 그때 그는 나를 구원의 상태에 있게 함으로써, 실현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종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종한다. 아들은 행동하고, 아버지는 승인한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복종시킨 그는 복종된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우리의 상황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그러한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보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울부짓음의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은 아버지에 의해서도 그 자신의 신성(마치 신성이 고난을 두려워해서 스스로 고통받는 자로부터 떨어져나간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에 의해서도 버림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대체 누가 그를 억지로 태어나게 하거나 십자가에 오르게했는가? 내가 말한 대로, 그는 자신 안에 우리의 상황을 재연한다. 왜냐하면 이전에 버림받고 경시된 것은 바로 우리이지만, 우리는 지금 고난받을 수 없는 분의 고난에 의해 가까워지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시편에 있는 말을 할 때에, 그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의 죄악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21편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한 것, '외침'과 '눈물'과 '탄원', '그의 외침이 들린 바 된 것' '경외함'의 결과로서 복종을 배웠다는 사실은 똑같은 문제와 관련된다.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구성된 극적인 재연이다. 왜냐하면, 말씀으로서의 그는 복종적이지도 않고 불복종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용어는 오직 신하들과 부하들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복종적인'이라는 말은 예의바른 자들에게 적용되고, '불복종적인'이라는 말은 처벌받을 만한 자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의 '종의 형체'에 관해서는, 그가 내려와서 자기의 동료-종들의 일원이 되고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형체를 취하여, 나와 나에게 속한 것들을 자신이 떠맡고, 그럼으로써 불이 왁스를 다 태워버리거나, 태양이 땅의 안개를 걷어가는 것처럼, 자신 안에서 죄악을 태워버리고, 나는 이 혼합에 의하여 그에게 속한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있어서 경의를 표하여 순종하고, 자기의 '고통의 결과로 복종을 경험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천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은 것은 복종의 경향이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며, 경향은 행위에 의해 증명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험을 직접 알고 우리가 견뎌야만 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언약함을 고려한다 … 왜냐하면 만일 숨기는 커튼 때문에, 이생의 어둠 속에서 비취는 빛이 그 어둠에 의해 핍박받았다면(그 어둠은 악한 것으로, 사탄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약함 가운데 있는 인간의 어두움에 어떤 핍박이 올 것인가? …

 

회복의 시간에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대화재에서 구해낸 그슬린 나무가 다시 회복되는 것처럼, 단지 그에게로 다시 흡수된 아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이 이 본문을 자신들의 파멸에 사용하지 않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한 신성을 의미하고,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도 거의 가지지 못한 채, 우리의 동작과 고통 때문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더 이상 우리가 복수로 존재하지 않을 때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거룩해져서, 하나님만, 오직 하나님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는 완전한 경지이다 … [골 3:11] <or. 30. 5, 6>

 

3. 그리스도의 위격

 

(a)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

 

[요 14:28의 "아버지는 더 크시다"와 요 20:17의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

그는 말씀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진 자의 하나님이라 불리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는 자신이 순수하게 하나님인 자의 하나님이 될 수 있었는가? 똑같은 방법으로 그는 보여진 자의 아버지가 아니라, 말씀의 아버지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하여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칭호는 적절하게 적용되고, 다른 하나의 칭호는 부적절하게 적용된다. 우리에 관하여도 똑같으나, 그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라 적절하게 명명되지만, 아버지라 명명되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교도들의 오류, 즉 이름들을 결합하여 (두 본성의) 혼합 때문에 이름이 교환되는 오류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본성들이 따로따로 생각될 때, 명명법의 특징이 개념들의 특징과 부합한다는 사실에 의해 보여진다. 바울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목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이다. 비록 둘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할지라도, 그것은 본성의 단일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두 본성들의 연합에 의한 것이다. 무엇이 더 분명할 수 있을까? <or. 30. 8>

 

그는 존재했고, 그는 되어진다. 그는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했고, 그는 시간에 종속되었다. 그는 불가시적인 존재였지만 그는 가시적으로 된다. "그는 처음에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는 하나님이었다." '있었다'(was)라는 말은 강조하기 위하여 세 번 반복된다. 그는 과거의 자기를 버리고, 과거에 자기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취했다. 그는 둘로 되지 않았으나, 자신이 두 요소들로 이루어진 단일체가 되도록 허용했다. 왜냐하면 취한 것과 취해진 것은 신성으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 두 본성들은 단일체로 연합된다. 그리고 두 아들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들의 혼합에 대하여 실수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or. 37. 2>

 

그는 자기의 모습을, 인간의 본성, 육신과 영의 상반되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 단일체인 인간의 본성을 지닌,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그는 육신을 신성하게 했고, 영은 이미 신성하게 되었다. 오 기묘한 혼합! 오 불가사의한 혼합! 존재하는 그가 존재하게 된다. 신성과 총체적인 육신 사이에 가교를 놓은 지성적인 영혼의 중재를 통하여 창조되지 않은 자가 창조되고, 제한받을 수 없는 존재가 제한받는다. 부요한 자가 빈곤해진다. 내 육신의 빈궁함을 그 자신이 취하여, 나는 그의 신성의 부요함을 받을 수 있다. 충만한 자가 비워진다. 그는 잠시동안 자기 자신의 영광을 비워서, 나는 그의 충만함을 공유할 수 있다. 선이 얼마나 풍성한가! 나와 관련된 이것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나는 신적인 이미지를 공유했고 나는 그것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이미지를 구원하고 그 육신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기 위하여 나의 육신을 공유한다. 그는 우리와 함께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놀라운 두 번째 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그때 나는 영예를 나누어 주고, 이제 그는 굴욕을 분배해 준다. 후자는 더 거룩한 행동이고, 사려깊은 사람들은 그것이 더 숭고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or. 38. 13>

 

그때에는 불가사의 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즉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 희미해졌다가 다시 빛나는 태양(왜냐하면 피조물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고통을 공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찢어진 휘장, 그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피와 물(후자는 그가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전자는 그가 인간 이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진, 깨어진 바위들, 최종적이고 일반적인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죽은 자들, 묘소에서 일어난 이적, 그리고 그후에 일어난 기적들, 누가 가치있게 찬양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경이로운 나의 구원과 비교될 수 없다. 피 몇 방울이 전 세계를 새롭게 하고, 인류를 위하여 응유(凝乳)가 우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 즉 모든 사람들을 단일체로 묶고 단단히 결합시킬 재료가 되었다. <or. 45. 39>

 

이 사람들[즉, 아폴리나리우스의 추종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자신들이 속아서, '주님의 사람'(the Man of the Lord) (더 진실되게 주님이며 하나님인 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기 위해)은 인간적인 지성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인성을 신성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한 분이며 똑같은 분이라고 가르친다. 이전에 그는 사람이 아니었고, 만세 전에 몸이나 육체적인 어떤 것과도 관계되지 않은 성자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또한 인간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성을 입었다. 육신으로는 고통받을 수 있고, 신성으로는 고통받을 수 없다. 육신에 제한되었지만, 영으로는 제한받지 않는다. 땅에 있고 동시에 하늘에 있다. 가시적인 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동시에 존재의 분명한 질서에 속해 있다.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죄에 빠졌기 때문에, 인간은 총괄적으로, 완전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인 분에 의하여 새로이 형성될 수 있다.

 

성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신성과 접촉이 없다. 마찬가지로, 신성은 인간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인성은 정상적인 잉태 과정을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동정녀 안에서 단번에 신성과 인성으로 형성되지 않고, 통로를 통과하는 것처럼 동정녀를 통과했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적인 존재가 먼저 형성되고 그리고 나서 신성이 잇따랐다고 말한다면, 그는 비난받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탄생이 아니고 탄생의 무효일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도입하여,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와, 똑같은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올마로 믿는 자들에게 약속된 '양자들'에 도달하지 못한다. 참으로 신성과 인성(인성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의 두 본성들이 있다. 그러나 두 아들을 혹은 두 하나님들은 없다. 또한 바울이 인성에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가 있다는 방식으로 말할지라도, 이생에서 우리는 두 인성을 가지지 않는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세주를 구성하는 두 가지 분리된 요소들이 있으나(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들과 동일하지 않고, 또한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다). 두 가지 분리된 존재들은 없는데, 분명히 없다. 두 요소들은 섞여서 하나로 되는데, 신성은 인성을 떠맡고, 인성은 신성을 받아들인다. 나는 두 요소들을 말하지만, 두 존재들을 말하지는 않는다. 한편 삼위일체에서는 그 반대가 옳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구별되는 존재들이 있어서 우리는 위격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이 하나이고 신성에 대해서는 같기 때문에 분리된 요소들은 없다. 만일 신성이 인성에 결합되지 않고, 영원한 결합 대신에, 그리고 본질에 관여하는 대신에, 예언자 안에서처럼, 신성이 은혜로 그의 안에서 작용한다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런 사역이 없는 사람이다. 사실상 그는 상반되는 영감으로 채워진 자이다. …

 

인간 정신을 결여한 인간 존재에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이 참으로 지각이 없는 자이고, 완전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취해지지 않은 것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인 타락한 아담의 반이었다면, 반이 취해지고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락한 아담 전체였다면, 그것은 탄생한 자의 전체에 결합되고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이 완전한 구원을 시기하지도 못하게 하고, 구세주를 단지 인간의 대표자로, 뼈와 근육으로만 입히게 하지 말라. 만일 그의 인성이 인간의 영혼을 결여했다면, 그것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은 육체의 경험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근거로, 그들은 그 결과 고난을 신성에 돌릴 수 있다. 만일 그의 인성이 영혼을 가졌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비이성적이거나 비지성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비이성적이라면, 어떻게 참된 인간일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지성 없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성의 외모, 즉 외관이 있었던 반면, 영혼은 말 혹은 황소의 영혼이었고, 혹은 지성 없는 짐승들의 영혼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구원받는 것일 것이고, 나는 기뻐하는 반면 다른 존재는 영예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진리에 의해 속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지성적인 영혼이었다면, 인성은 인간적인 정신을 결여하지 않았고, 우리의 적대자들은 정말로 이렇게 분별없는 태도를 중지해야만 한다. …

 

아폴리나리우스 같이 선한 선생, 당신은 나의 마음을 경멸하여, 하나님을 육신에 결부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단지 결부시킬 수 있는 가능한 양식이라는 이유에서 그러하다. 당신은 나를 '인간을 경배'(anthropolatry)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신을 '육신을 경배'(sarcolatry) 한다는 비난을 자초한다. 당신의 이론은 '중간 담을 허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에 대한 나의 설명은, 학습이나 철학에 대한 매우 작은 요구를 가진 인간에 대한 설명은 무엇인가? 나는 정신이 정신과 섞여서 더 가깝고 더 동질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신성과 인성은 신성과 총체적인 육신 사이에 있는 다음의 중재를 통하여 결합된다고 샌각한다. <ep. 101. 4-7, 10>

 

그들에게, 인간이 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구절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가 육신이 된다는 데 있어서,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만일 그 목적인 그렇지 않으면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 제한받아야 하고, 그가 커튼 아래에서처럼 육체를 입은 인간들 사이로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교묘한 거짓이고, 그들이 재연하는 미묘한 연극이다(그가 불타는 덤불처럼, 그리고 초기에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것처럼, 다른 방법들로 인간들과 접촉하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의 목적이 같은 것으로 같은 것을 축성함에 의해 우리 죄악의 저주를 제거하는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육신의 저주 때문에 육신을 입을 필요가 있었고, 영혼의 저주 때문에 영혼을 입을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그는 똑같은 이유 때문에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음에 틀림없다. 아담의 마음은 단지 죄에 말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의사들이 질병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먼저 영향받았다. 왜냐하면 명령을 받은 것이 그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실패하는 가운데 그것은 감히 범죄했다. 그리고 범죄한 것은 구원받을 필요가 매우 많은 상태에 있다. 그리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또한 취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취해진 것이다. <ep. 101.11>

 

(b) 그리스도의 인성과 의지

 

[성서에서부터 나온 유노미우스의 논증들 중] 7번째 논증: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만일 이 말이 내려온 자가 한 말이 아니라면, 그 표현은 인성으로부터 오는 형태를 취했다고, 즉 그렇게 간주된 구세주로부터 오지 않았으나(왜냐하면 그의 의지는 전적으로 신격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최소한 하나님에게 대립된 정도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간주된 그로부터 왔다고, 우리는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신적인 의지에 따르지만, 흔히 그런 것처럼, 신적인 의지와 싸우고 씨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에 대한 해석이다. 구세주로 간주된 그가 그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 혹은 그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를 저항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논증 중에 있는 그 말은 인성을 취한 그에게서 왔고, 취해진 본성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답은 그 말은 아들이 아버지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고, 그가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의 의미는 '나의 의지는 당신의 의지와 다르지 않으니 나의 의지대로 하지 말고, 우리의 신성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의 의지는 하나이니, 당신과 나에게 공통적인 의지를 수행하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 주장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은 형태가 모호하고, 언급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는 그가 양을 정하여 성령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는 것과 양을 측정하는 것이 모두 부인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 측정되지 않는다. '나의 죄도 아니고 나의 사악함도 아니다.' 이것은 죄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다' - 우리는 그것들을 행하지 않았다. 한 구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볼 때 분명히 옳다. 아버지의 의지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아들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최종적인 부활에, 아니 회복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그러나 아들의 뜻은 고려하지 않은 것인가? 아들은 복음을 마지못해 가져오는가? 사람들이 그를 믿는 것은 그의 뜻에 상반되는 것인가? 누가 이것을 신용하겟는가? 그러므로 "네가 듣는 말을 아들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다"라는 말은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or. 30. 12>

 

내 생각으로는, 그는 본질 면에서 아버지와 동일하기 때문에 아들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외에도,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그가 '독생자'라고 불리는 것은, 오직 한 아버지의 독생자이며 오직 한 아들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육체적인 아들들의 탄생과 구별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탄생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다. 그는 '말씀'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가 마음에 대한 말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또 definiendum에 대한 정의의 관계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logos)도 또한 이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한 자' (즉 '본 자')는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했다'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낸다. … 그리고 이 호칭에 대한 다른 이유는 사물들 안에 내재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본요소로서 로고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한 주님에 대한 칭호들 -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목자, 대제사장 등]

아들에 대한 칭호들이 있다. 그것들을 개설해 보라. 어느 정도 신성에 적합하게 높여진 칭호들과 동정심을 지닌 그의 육체적인 존재를 언급하는 칭호들이 있다. 혹은 신성에 적합한 태도를 전부 지켜서, 우리를 위하여 위로부터 내려온 자 때문에 당신이 아래에서부터 올라감으로써 신성해지도록 하라. 만물 안에서, 그리고 만물 앞에서, 이 본문을 붙들라, 그리하면 높아지거나 비천한 칭호들에 관하여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육체적인 형체로 있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로도 '영원히 마찬가지이다'. <or. 30. 20>

 

(c)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무지

 

[성서에서부터 시작된 유노미우스의 논증들 중] 10번째 논증은 그리스도의 무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나니, 아들조차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어떤 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즉, 그는 지혜이며, 세상의 창조주이고, 만물을 완성하고, 만물을 재창조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 되는 자가 어떤 것을 모를 수 있냐는 말이다. … 보이는 것들을 보이지 않는 것들과 구별한다면, 하나님으로서 그가 아는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무지하다고 고백하는 것인가?

 

'아들' 이라는 칭호는 조건 없이, 누구의 아들인지 상술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로 보아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가 신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지에 더 존중하는 의미를 부여한다.

 

만일 이 주장이 견실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뢰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 하나의 설명은, 아들이 가진 그 밖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지식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원천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구절을 이렇게 읽는 데 있어서 우리 학자들 중 아무도 따르지 않았던 사람조차, 아들의 지식이 아버지의 지식에 의존할 때까지를 제외하고는 아들조차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 것 같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추측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들은 아버지가 알기 때문에 아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시원적인 존재로부터가 아니면 이런 지식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or 30. 15>

 

4. 그리스도의 사역

 

속죄

 

우리는 이제 일반적으로 간과되어 온 교리 사항을, 비록 그것이 나에게는 주의깊게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검토해봐야 한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를 위해 흘린 피가 누구에게 제공되었으며, 우리 하나님, 우리의 제사장, 우리의 희생자의 이 값지고 영광스러운 피는 왜 제공되었는가? 우리는 악마에게 붙잡힌 포로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노예로 팔렸고', 우리의 약함은 우리의 쾌락을 위해 우리가 치른 대가이기 때문이다. 속전은 보통 포획자에게만 지불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 속전은 누구에게 제공되었고, 왜 제공되었냐? 악마에게? 얼마나 모욕적인가! 만일 단순히 도둑이 하나님으로부터 속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속전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이 독단적인 권세 행위를 위한 지불이 과다해서 그것은 그가 우리를 풀어주는 것을 분명히 정당화시켰다!

 

만일 그것이 아버지에게 지불되었다면, 우선 왜일까? 우리는 그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없었다. 두번째로, 왜 독생자의 피가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었을까? 왜냐하면 이삭이 아버지에게 의해 바쳐졌을 때, 이삭조차 그는 받지 않았고, 이성적인 희생물을 대신하도록 어린 양을 대체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물을 요구하거나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은 신적인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즉 인간이 하나님의 인성에 의해 거룩해져야 하고, 그 결과 그는 그 폭군을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우리를 구하고 분명히 만물을 넘겨주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이 신적인 계획을 수행한 아들의 중재를 통하여,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데려갈 수 있으므로, 아버지가 희생제물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만큼 많이 말해왔다. 경건한 침묵으로 간과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더 많이 있다. 뱀에게 물린 상처에 대한 치유책으로 매달린 놋뱀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아니라 병행물(antitype)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들을 구했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멸절한 만한 것을 만날 때 그것은 그 종속 권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적합한 묘비명으로 무엇을 인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렇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는 십자가 옆에 놓여지고, 생명을 주는 자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 너는 죽어서, 움직임이 없고, 둔하고, 그리고 (뱀처럼 되기 위하여) 너는 기둥 높이 매달렸다. <or. 45. 22>

 

5. 성령

 

(a) 성령의 신성

 

신학에 관심있었고 그리스도인에 가까워졌던 희랍 사상가들은 성령에 대해 어렴풋이 느꼈으나, 그들은 칭호에 관하여는 달라서, '보편자의 마음', '우리 바깥의 마음'과 같은 이름들로 불렀다. 우리 지식계급의 어떤 멤버들은 성령을 '활동'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은 성서가 그 문제에 대해 분명히 계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서에 대한 경외심을 통하여 결단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그들이 성령을 경외하지도 않고 그를 모욕하지도 않지만, 그에 관하여 일종의 중립적인 입장을, 오히려 멸시할만한 입장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으로 그를 경외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입술로만 그를 경외할 정도까지 간다. 훨신 더 영리한 사람들은 신성을 측량한다고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세 존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결합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그 세 존재들 사이에 차이를 두는데, 첫째되는 것은 본질과 능력에 있어서 제한받지 않고, 둘째되는 것은 능력에서 제한받지 않으나 본질에서는 제한받고, 셋째되는 것은 본질과 능력 모두에서 제한받는 것이라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데미우르고스(Demiurge), 동료(Fellow-worker), 그리고 섬기는 자(Minister)라는 이름들을 사용하는 자들을 다른 형태로 모방하고, 그 이름들의 상대적인 서열과 영예가 그것들이 나타내는 실재들 속에 차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or. 31. 5>

 

(b) 성령의 발출(Procession)

 

[성령반대론자들(Pneumatomachi)은 만일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났으면 아들이 둘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만일 성령이 아들에게서 났으면 성령은 아버지의 손자라고 했다.]

우리는 비출생과 출생 사이의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당신들의 딜레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인상적인 딜레마가 사라지면, 당신들의 '형제들'과 '손자들'은 당장 사라진다. … 당신들은 '발출하는' 것에 어떤 지위를 부여할 것인지 나에게 말해 달라.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히 당신들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그것은 당신들의 기준을 초월하는 신학자로부터, 사실상 우리의 구세주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외에, 당신들의 '세번째 성서'(Third Testament)를 적합하게 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당신들의 복음서에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하는 성령' 이라는 말을 제거했다.

 

그는 그런 근원에서 발출한다는 의미에서,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들이 아니다. 그의 신분이 비출생과 출생 사이의 중간에 있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이다. 이리하여 그는 당신들의 정교한 이론들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당신들의 딜레마들에는 너무 강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발출'이란 무엇인가? 만일 당신들이 아버지의 '비출생'(ingeneracy)을 설명하려 한다면,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겠다. 그리하여 우리 둘 다 하나님의 신비를 뚫어지게 보며 열중하자. 누가 그런 일들을 꼬치꼬치 파고 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코 앞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를, 빗방울을, 끝없는 시간의 날들을 헤아릴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깊이에 침투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고 우리 이성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의 본성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성령은 아들의 수준에 이르지 못할까? 왜냐하면 만일 그가 모자라지 않았다면, 그는 아들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자라지' 않다. 하나님 안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말하자면, 그들이 존재하게 되는 데 있어서 차이점과 그들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그들의 칭호의 차이점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가 되기에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 신분은 결핍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버지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는 아들이 되기에 '모자랄'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들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결핍을 수반하지 않고, 본질에 있어서 어떤 열등함을 수반하지 않는다. '비출생', '출생', '발출'은 그들이 각각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그 결과 그 세 위격들의 구별이 혼동 없이, 하나의 본성과 신성의 지위 안에서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오직 한 분 아버지만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전부이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아들이 아니다(한 아들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존재하는 전부이다. 셋은 신성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는 위격적인 특징들 안에서 셋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벨리우스적인 단일성 개념과 최근에 삼위일체 안에서 그릇되게 구별하는 교리를 피한다.

 

"뭐라구? 그래서 당신들은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그렇다. "그와 같이 당신들은 참으로 그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가 하나님이라면 그렇다. "그런데, 동일한 근원에서 온 두 본질들이 있어서, 하나는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보여달라. 그들이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나에게 보여달라. 그러면 나는 그들 각자가 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당신들이 나에게 한 종류의 신 이상이 있다는 것과 하나의 신성 이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들에게 이와 똑같은 당신들의 삼위일체, 칭호들, 실재들을 보여주겠다.

 

아담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피조물(handiwork)이었다." 하와는 무엇이었는가? "그 피조물에게서 취해진 일부분이었다." 셋(Seth)은 무엇이었는가? "그 둘의 자손이었다." 당신들에게 그 피조물, 일부분, 그리고 자손은 똑같은 본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가? "분명히 그렇다." 그들은 동일본질이다. 그렇지 않는가? "확실히 그들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양태들로 존재하게 되는 존재들이 똑같은 본질을 지닐 수 있다는 인정이다. 이것을 말함에 있어 나는 신성에 피조물, 혹은 일부분의 개념, 혹은 다른 물리적인 개념을 신성에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나는 어떤 흠잡기 좋아하는 비평가가 이 점을 이용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순히 그러한 예들을 고차적인 실재들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을 관찰하기 위한 일종의 무대로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사변들이 오류의 혼합 없이 온전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하다. …

 

우리에게는 한 종류의 신성밖에 없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 단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는 존재들은 그 근원에 다시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비록 우리가 셋으로 존재하는 그들을 믿을지라도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신적이고 다른 것은 덜 신적인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가 먼저고 다른 것이 이차적인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의지의 단절이 없고, 능력의 나뉨이 없다. 또한 신성 안에서는 각 개체들의 구별되는 어떤 특징도 보여질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위격들은 나뉘어 있으나, 신성은 각 개체 안에서 온전하고 나뉘지 않는다. 세 개의 태양들이 각자에게 결합되어 하나의 혼합된 빛을 내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우리가 신성, 첫번째 원인, 그리고 군주정체를 바라볼 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나이다. 그러나 신성이 존재하고, 첫번째 원인에서 나와 거기서부터 그들의 존재를 무신간적으로 그리고 똑같은 영예를 지니고 나오는 존재들을 볼 때, 우리가 경배하는 세 대상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른다. 희랍인들은 보다 더 심오한 그들의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의 신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전 인류를 구성하는 단 하나의 인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이 아닌 많은 신들이 있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에 보편적인 본성은 단지 개념적인 단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개체들은 시간에 있어서, 경험에 있어서, 그리고 수용성에 있어서 서로로부터 널리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요소들로 된 존재들일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들에게 상반되어, 단 하루 동안조차 완전히 똑같이 남아있지 못하고, 더군다나 우리 일생 동안은 더욱 그렇지 못하다. <or. 31. 8-11, 14, 15>

 

6. 삼위일체

 

(a) 세 위격들: 하나의 신성

 

우리는 희랍의 다신론을 피하기 위하여 세 개의 근원들을 가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유대인의 하나님처럼 좁고, 질투가 있고, 무력한 의미에서 하나인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다. 또한 우리는 아들을 아버지로부터 산출하고 그리고 나서 그를 분해해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이론처럼, 신성을 자기-소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단일성을 보존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마치 신성이 이 파생된 존재들이 거역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혹은 마치 신성이 피조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보다 더 영리한 자들이 결정하는 것과 같이, 두번째와 세번째 위격들의 본성을 낮추고 그들을 신성으로부터 제거함으로써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아들을 비출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한 분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을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생자는 한 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격들을 신성 안에서 그들의 특이성을 가지는데, 하나는 아들 신분으로, 다른 하나는 아들 신분이 아닌, 발출한 것으로의 특이성을 가진다. …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공통적으로, 피조되지 않고, 신적인 존재이다. 아들과 성령은 공통적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아버지에게 독특한 것은 그의 비출생인데, 아들을 낳고, 성령을 보낸다. …

 

단일체[Monad]는 삼위일체[Triad]로 예배받고, 삼위일체[Triad]는 단일체[Monad]로 예배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라. <or. 25. 16, 17]

 

하나님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세 견해들은 무신론(혹은 무정부 상태), 다신론(혹은 다두(多頭)정치), 그리고 일신론(혹은 군주정체)이다. 희랍의 후손들은 처음 두 견해를 가지고 놀았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게임을 하도록 내버려 두자. 왜냐하면 무정부는 무질서이고, 다두정치는 당파적인 분열을 내포하고, 그러므로 무정부와 무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들 둘은 똑같은 방향, 즉 무질서로 이끈다. 그리고 무질서는 분열로 이끈다. 왜냐하면 무질서는 분열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리숙여 받는 것은 일신론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위격에 제한된 일신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실재는 그 자체에 반대하여 나뉘어져서 다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신론은 본성의 동등성, 의지의 조화, 활동의 동일성에 의해 형성되며, 일자(One)에서 유래하는 존재들이 일자와 동시 출생하고, 피조된 존재들 사이에서 불가능한 단일체이며, 그래서 그들은 숫자적으로 구분되는 한편 본질[ousia]에 있어서 단절이 없다. 본래의 단일체는 이원성으로 활동하고 삼위일체로서의 최종 형태에 도달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가진다. 아버지는 낳는 자이며 발출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변화를 겪어나 일시적인 연속이나 어떤 물리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히 물질적인 어떤 암시들을 피할 정도로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용어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이것이 발생했는가?' 그러한 행동들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만일 유치하게 말해야 한다면, 그들은 아버지의 존재와 동시에 발생한다. '언제 아버지는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다시 물어보라. 그러면 대답하겠다. '언제 아들은 태어났는가?' 아버지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이다. '언제 성령이 생겼는가?' 아들이 생기지 않았으나, 무시간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생겼다. 우리가 무시간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일시성의 암시를 피하려 하면, 우리는 좌절된다. 왜냐하면 '언제'(when)와 '전'(before), 그리고 '원래'(originally)라는 말들은, 우리가 아무리 애쓸지라도, 일시적인 함축성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초시간적인 실재들과 같은 기간, 즉 시간이 측정되는 것과 같이 태양이나 다른 종류의 움직임의 과정에 의해 측정되거나 나뉘지 않는 기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영원성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존재들이 영원한 공존한다면, 그들은 똑같이 시작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들은 첫번째 존재보다 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게서 유래한다. '시작 없는' 이라는 말은 '영원한' 이라는 말을 함축한다. 그렇다. 그러나 이 존재들이 그들의 기원으로서 아버지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영원한' 이라는 말은 반드시 '시작이 없는' 이라는 말을 함축할 필요는 없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원인에 관해서는 시작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원인이 시간 속에서 그것의 결과들보다 반드시 앞서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태양은 햇빛보다 먼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당신들이 이 개념을 단순한 마음들을 쫓기 위한 요령으로 사용할지라도) 그들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에서 시작이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그들로부터 생기므로, 그들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or. 29. 2>

 

(b) 전문 용어들 - 본질(Substance), 본성(Nature), 위격(Person),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

 

"나의 양들은 나를 따른다." … 그들은 … 사벨리우스가 세 존재들 속에 있는 하나라고 정의하는 대신에, 셋을 하나로 축소시킬 때, 그와 그의 '융해' (나는 차라리 그것을 '흡수작용' 이라고 부르고 싶다)의 '분석'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들은 아리우스와, 그리고 다양한 본성을 지닌 그의 종속자들과, 신성을 탄생하지 않은 자에게 제한하는 유대교의 형태와, 지상의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그의 기원을 취했다고 하는 포티누스(Photinus)에게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신성으로 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경배할 것이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만일 당신들이 이에 화를 내지 않는다면)도 하나님이다. 그들은 지성적이고 완전하며 그들 자신이 개체적으로 존재하며 숫자적으로 구분되지만 신성 안에서는 구분되지 않는, 세 위격으로 나타난 하나의 본성을 예배한다. <or. 33. 16>

 

삼위일체의 상호관계들과 성질들에 대한 지식은 삼위일체 자체에, 그리고 삼위일체가 그것을 이미 계시했거나 나중에 계시할 정결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맡기는 것으로 만족할 문제이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 시작이 없는 존재에 의해, 발출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똑같은 하나의 본성이 있어서, (어떤 유비도 진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것들이 초월적인 실제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감각적인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지성적인 질서 속에서 실재들을 재연할 수 있는 한) 우리의 마음, 언어, 그리고 영에 대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 각 실재(Entity)는 따로 간주될 때, 마음이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할 때, 하나님이다. 활동과 본성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함께 생각될 때, 셋은 하나님이다. <or. 23. 11>

 

하나님은 구별되는 속성들, 혹은 휘포스타시스들[hypostases], 혹은, 당신들이 좋다면, 위격들[prosopa]에 관해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칭호들이 똑같은 개념으로 인도하는 한, 그 칭호들에 관하여 논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 즉 신성의 범주에 관해서는 하나이다. 신성은, 말하자면, 차이점들이 없이 구별되고, 그 차이점들을 폐지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다. 신성은 셋 안에서 하나이고, 셋은 하나이다. 신성은 셋으로 존재한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신성은 셋이다. 우리는 위격들 사이의 어떤 우월이나 열등의 개념을 피해야 한다. 혹은 우리는 연합을 혼동으로 변질시켜서도 안되고, 차이점을 본성들의 차이로 변질시켜서도 안된다. 우리는 사벨리우스의 동일시와 아리우스의 차별화로부터 똑같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정반대되지만, 똑같이 불경한 오류들이다. <or. 39. 11>

 

(c) 출생과 비출생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이 있고, 그에게서 만물이 나온다. 그리고 한 분 성자 하나님이 있는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왔고", 한 분 성령이 있는데, "그 안에 만물이 있다." '그로부터'(from whom), '그를 통하여'(through whom), '그 안에'(in whom)라는 구절들은 본성들 안에서 단절시키지 않지만 (만일 그들이 그렇다면, 전치사들이 교환될 수 없고, 혹은 호칭들의 순서가 바뀔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을 혼동되지 않는 하나의 본질 안에 있는 위격적인 구별들을 나타낸다. 이것은, 만일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다. 그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으리로다, 아멘."라고 그 사도가 말한 구절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다른 장소에서 결합된다는 사실로 보아 명백해진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시작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끌어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들로서, 그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볼 때, 시작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만일 일시적인 시작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아들은 시작이 없다. 왜냐하면 시간을 만든 자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은 참으로 거룩한 영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했는데, 아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일 명확성을 위하여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야 한다면) 발출에 의해서 나왔다. <or. 39. 12>

 

시작이 없는 것, 그리고 처음인 것, 그리고 시작과 함께 있는 것, 이것들은 한 분 하나님이다. 시작이 없는 것의 본성은 시작의 결여도 아니고, 출생의 결여도 아니다. 왜냐하면 실재물의 본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정의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시작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것에 의하여, 시작이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작은 전자의 본성이 아니며, 후자의 본성이 시작의 결여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본성의 속성들이지 본성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시작이 없는 것과 함께 있고, 시작이 있는 것들과 함께 있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작이 없는 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작이 있는 것은 아들의 이름을 가지며, 시작이 있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은 성령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들 셋은 똑같은 본질, 즉 신성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단일체의 근본 요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다른 둘은 그들의 존재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융해될 정도로가 아니라, 긴밀하게 결합될 정도로 일치되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혹은 의지 속에서, 혹은 권능 속에서 분리가 없다. 이들 요소들은 우리 사람들을 복수가 되게 하고, 각 개체를 자신과 그리고 다른 개체와 다투게 한다. 그러나 단일체는 단 하나의 본성을 가지고 그들의 본질적인 존재가 동일한 자들에게 당연히 속한다. <or. 42. 15>



[헨리 비텐슨, 후기 기독교 교부 중에서]